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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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오만의 소산인가, 새로운 겸손인가-
가끔은 지금의 인간이 당돌하면서도 다양하며 참신한 생각과 질문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낼 수 있게 된 것은 결국 인간이 이 세계를, 지구를, 더 나아가 우주를 지배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나온 오만의 소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간의 궁금증 확장이 과연 어디에까지 미칠까에 대해서도 내심 기대감을 품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가끔가다 그런 인간에 대해 생각할 때면 문득, 이제 막 두세 살 정도 된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 느낄 수 있는 불안과 기대감에 동시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러한 지적호기심이 가지고 올 결말이 과연 인간의 지속을 보장할지, 아니면 파국에 치닫게 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일 테다.
'이 손안에 든 칼은 사람을 살리는 칼이냐 죽이는 칼이냐.'
호기심이란 어쩌면 이러한 칼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이에 대해 과연 어떠한 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소위 '꼰대' 혹은 '보수주의자'의 이름을 뒤집어 쓸 수도 있겠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인간의 지식 확장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당장 여건이 갖춰진다면 할 수 있고 이뤄낼 수도 있음에도 '차마 그리 하지 않는' 절제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탱해줄 수 있는 힘은 단순한 수학적 도식화가 가능한 인간의 메마른 이성이 아닌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 얻게 되는 직관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나의 이런 생각은 다음의 질문에도 똑같이 유효할 것인가?
“왜 세상은 무가 아니라 유인가?”
우리가 세상을 만들고 기록해 내려간다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같은 환상은 가끔은 너무나 그럴듯해 보인다. 그렇지만 위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은 잘 생각해보면 ‘세상과 우리 자신의 영역에 대한 감정’을 그 일의 방향이 변형되어가는 과정 안에서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순전한 존재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놀라움은 존재의 뒤에 숨어 있는 이유를 찾아내기 시작하면서 느껴지는 새로운 경외심으로 진화해갈지도 모른다. 존재의 불안정성에 대한 우리의 가벼운 불안감은 어쩌면 이 세상이 확실하고 분명하며 지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바뀔 수 있는 또 다른 확신을 심어주는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이 그저 존재론적인 비누 거품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무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그 우주적 공포에 무릎을 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의 지성이 닿을 수 있는 미래의 영역에 대한 지금의 생각은 그 한계를 인정하는 새로운 겸손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둘 다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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