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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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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형도
댓글 0건 조회 6,104회 작성일 15-09-01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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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레오 1세-

 

         가장 최근에 가본, 가장 기억에 남는 해외여행은 로마 여행이었다. 그것도 이미 몇 년 됐지만. 친구들과 여행을 가건 가족과 가건, 항상 해외 나가면 맛집 찾고, 기막힌 맥주 찾고, 어쩌다 정신 차리면 남들이 말한 그저 그런 관광지 찾아다닌 게 다였던 나의 해외여행들. 그렇기에 머리 크고 정신 차려서 간 로마가 나에게는 당연히 기억 속 깊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아 물론 그 때도 잠을 줄이고 밤부터는 술을 접하는 데 집중했던 것 같다.

          로마는 가톨릭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로마에서 3~4일을 머물며 종교적으로 유명한 곳(굳이 종교적인 곳이 아니라 해도)과 유명한 건축물들을 접해 보니 종교의 색은 감출 수가 없더라. 이 감회는 바티칸에서 정점을 찍었던 듯하다. 이래저래 듣고 돌아와서 좀 더 관심 가져보고 한 가톨릭에서 상당한 흥미로움을 느꼈던 바, 글을 적어보려 한다.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교황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울 반석으로 택한 사도 베드로로부터 시작된다.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 이 계보에는 베드로와 요한 바오로 2세같이 존경 받는 ‘성인’들도 있지만 죄악으로 악명 높은 교황들도 있다. 오늘은 이 많은 성인들 중, 성 레오 1세의 활약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비잔티움 제국과 동로마 제국 모두 황제 레오 1세가 있다. 그냥 쓰게 되면 보통 동로마 제국 황제인 레오 1세로 생각하게 된다. 보통은 교황이라는 직책을 앞에 붙이면서 구분하게 된다.

          도시 ‘로마’를 구한 레오 1세의 활약은 대표적인 두 사건으로 전해진다. 훈족의 아틸라, 그리고 반달족의 가이세릭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지켜낸 두 가지다. 452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침공을 받았을 당시 적군의 왕을 직접 담판하여 상대가 실속 없이 다시 물러나도록 했으며, 455년의 가이세릭의 반달족의 침략 때도 적들의 진영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후자 사건의 경우는 로마를 완전하게 구출하지는 못했다. 로마에서 피를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대신 반달족이 원하는 물자를 약탈하도록 한다. 침략의 목적은 내어주었으나 최소한 로마 시민을 살육에서 구하고, 로마를 방화로부터 구했다는 데에서 그의 업적을 옹호하는 바다.
         각기 짚어보면, 452년 아틸라가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했을 당시 본토의 대부분이 점령되고 로마 황제가 숨은 라벤나까지 훈족이 도달했을 때였다. 포 강에서 아틸라와 직접 협상을 했는데 레오 1세는 이 당시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고려하고 통찰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훈족의 침략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침략 과정에서 훈족이 겪은 말라리아와 보급부족으로 인한 전력저하를 정확히 파악했다. 이 침략으로 인해 아퀼레이아를 비롯한 많은 지역에 피해가 생겼지만, 한 대담한 주교의 협상이 로마를 비롯한 지금의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살렸다고 본다.
         455년 가이세릭의 침략 때의 협상은 이와 다르다. 상대가 용의주도했기에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다. 가이세릭이 로마와 훈족이 싸우는 동안 어부지리를 충실하게 챙겼다는 판단을 한다. 보통 로마는 밀 소비의 1/3에 해당하는 양을 북아프리카 일대로부터 얻는데, 가이세릭은 이곳을 장악했다. 이러한 구실로 실제로 로마는 반달족과 적대적인 대립각을 세웠으나, 로마는 이 당시 이베리아와 갈리아 남부를 장악한 서고트족과 훈족을 비롯한 안팎에 있는 적을 상대해야 했기에 반달족의 이러한 도발에 손을 쓸 수 없었다. 도리어 로마 사이에 일어난 내분을 틈타서 그럴 듯한 구실을 내세워 반달족이 로마를 침공했다. 이 침공 당시, 로마는 내분으로 실권자와 황제가 피살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로마를 지탱할 구심점이 없었기에 서로마 제국 자체가 유명무실했다. 도시 로마의 안전을 제대로 책임질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레오 1세는 침략자로부터 자비를 구해야만했다. 로마를 그들 손에서 완전하게 구출하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로마 시민들을 살육에서, 그리고 로마시를 방화로부터 구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레오 1세는 교회 역사 안에서 교황으로서는 처음 「막누스(Magnus, 大)」로 불리게 된다. 그 토대가 된 것이 위의 두 가지 사건으로, 역사적으로도 가장 중대한 사건이 아닐까 싶다. 도시 로마의 존속은 서방 교회 뿐 아니라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가 일어서는 토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주교가 앞장서서 도시를 지켰으니 후임자가 교황으로 자처해도 로마 시민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시대가 왔고, 이는 곧 대내적으로 로마 교회의 최고 통치권 기반을 확립하는 데 이르게 되었다. 그의 용기로 가톨릭 2천년을 열고 그 계보가 계속 이어져 온다는 것에 경의를 표해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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