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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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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태인
댓글 0건 조회 6,322회 작성일 15-10-0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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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저자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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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의 한 장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다. 역사의 재료는 사료이고, 사료를 남기는 측은 보통 당시 승자의 위치에 있어서이다. 그렇기 때문이 몇몇의 사람들이 역사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팽배하고, 진실조차도 왜곡되어 전해지기 일쑤이다. 이는 최근에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 <사도>는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혜경궁 홍씨가 집필한 <한중록>의 일화를 거의 그대로 각색한 영화이다. <한중록>과 영화 <사도>가 왜 승자의 기록인지 알기 위해서는 <한중록>이 탄생한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 년 전 영조 38년 뒤주에서 사도세자가 비참하게 죽었다. 그는 좁은 뒤주 속에서 8일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이승을 떠났다. 뒤주에 갇히기 전 세자는 뒤주의 모서리를 잡고 ‘아버지 살려주시옵소서’라고 빌었다. 하지만 세자가 8일 동안 뒤주에 갇혀있을 때 ‘세자를 살려주소서’라고 영조에게 간청 신하는 단 한명도 없었다. 단지 사도세자의 아들(정조)만이 관과 도포를 벗고 ‘아비를 살려주소서’라고 빌었을 뿐이다. 14년 동안이나 대리청정을 했던 사도세자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조정의 신하들은 세자를 구해달라고 임금에게 빌기는커녕 그 반대 행동을 한 것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다음 날 좌의정 홍봉한은 영조에게 이런 말을 한다.


    “한림 윤숙은 어제 신들을 꾸짖었고, 또 울부짖으며 거조를 잃었으니, 인심을 진정시키고자 한다면 엄히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날, 윤숙이 홍봉한을 비롯한 대신들에게 ‘왜 사도세자를 구하지 않느냐?’고 울부짖었다는 이유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의정 홍봉한이 <한중록>의 저자인 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였다는 사실은 <한중록>에서의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은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기록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집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776년 정조가 즉위한 당일, 궁궐에 대신들을 불러놓고,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 가슴 속에 간직했었던 한마디를 선포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조선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져 당파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영조는 외적으로는 탕평책을 펼치며 노론과 소론을 골고루 등용하겠다고 말했지만, 경종의 독살 사건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들로 유추해 볼 때, 영조는 노론이었다. 당시 노론은 영조를 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기세등등하게 조정을 휘어잡고 있었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들었으며, 특히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이면 된다는 착상을 전한 인물이 바로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례를 가지고 있던 노론에게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선포한 한마디는 공포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정조는 즉위 후에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을 적으로 삼고 파직과 귀향을 비롯한 처벌을 내링림으로써 노론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특히, 비극을 만들었던 가장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든 원흉인 홍봉한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홍봉한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였고,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사도세자의 죽음과 자신의 친정은 아무 관련이 없음을 극구 변명하기 위하여 - 즉, 자신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 <한중록>을 쓴 것이다. 사도세자를 정신병에 걸린 사람으로, 반역을 저지른 것처럼 묘사한 것도 노론 자신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었다는 혜경궁 홍씨의 변명인 것이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을 없앴다. 그렇게 사라져간 사도세자 사건의 진실은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이 메웠다. <한중록>은 이상적인 성격을 가진 영조와 정신병을 가진 사도세자의 충돌이 비극의 원인이라고 했다. 세자의 부인이 쓴 이 기록의 내용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녀가 쓴 이야기는 진실이 되었다. 하지만 실록의 기록은 다르다. <영조실록>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병자라는 이야기와 거리가 먼, 임금의 자질을 지닌 인물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정조실록>을 비롯한 여타 역사 사료들에 기록된 사실들을 통하여 가해자의 기록 이면에 담긴 역사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이 책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가 한국의 역사학계에 미친 영향은 거대했다. 다양한 반박들이 제시되었으며, 이런 의견 중에서는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정병설 교수의 의견이 대표적이다. 정병설 교수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이 책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며 이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는 한중록의 시각이 진실이라고 역설했다. 실제로 이 책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단지, 책 한권의 오류를 지적하는 수준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학계에 팽배한 학문의 권위적인 의식과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정국을 이어온 역사관에까지 얽힌 복잡한 문제인 것이다. 저자 이덕일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에 대한 역사학계의 비판은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폐해이며 이것이 우리나라의 역사학계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우리(일반적인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입장이 옳고 어떤 입장이 그른지 판단하기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두 주장의 근거나 논리를 살펴보고,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말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는 역사를 보는 근본적인 시각에서 출발해 보아도 되는 문제이다. 역시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해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록된 하나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한중록>과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의 저자의 관점과 같이 <한중록>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변명하는 저서일 수도 있는 것이고, 일반적인 역사학계의 관점과 같이 영조가 없앤 기록을 메워주는 중요한 역사적인 기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의 체계적인 논리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한중록>의 기록과 대조하여 <한중록>의 오류를 조선왕조의 공식적인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당시 사도세자와 정치적인 대립을 했던 노론을 중심으로 한 당파 싸움, 그리고 왕조 국가에서 왕권을 능가하는 신하의 권력이 있었던 상황 등을 자세하게 살펴 역사적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역사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영화 <사도>의 총 관람객이 50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영화 <사도>는 역사의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이다. 사도세자를 아무나 마구 죽이는 미치광이로 묘사했고 세자 살해의 주범인 홍봉한을 세자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장인으로 둔갑시킨 부분은 다양한 시각 없이 단지 가해자의 관점만 가진 영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걱정되는 사실은 영화 관람객들이 <사도>의 내용을 비판적인 시각 없이 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역사는 다양한 관점으로 읽힐 수가 있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은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사극을 보거나 역사서를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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