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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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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용준
댓글 0건 조회 5,954회 작성일 15-10-0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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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 제레미 리프킨


 

     최근,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의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그 사진에는, 끊임없는 전쟁을 피해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나라를 떠난 시리아 난민 가족이 파도물살에 떠밀려 모래사장에 나란이 누워있었다. 남들과 똑같이 이 세상에 태어나 똑같이 행복한 삶을 꿈꾸다가도 이들과 같이 목숨을 담보로 하여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괴로운 부분이다. 얼마 전 인터넷 뉴스에서, 중남미의 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을 보호하는 단체에 대한 소개기사를 접했다. 이들은 미국으로 무사히 넘어간다고 해도 대부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살아가야 할 텐데 왜 굳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갔던 것일까. 이유가 바로 종교분쟁이나 영토분쟁이 아닌, ‘소’ 때문이라고 하면 과연 수긍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소고기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라틴 아메리카의 광할한 영토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1960년대 세계은행과 미주개발은행의 차관에 힘입어 중남미 국가들의 정부는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열대우림 지역과 농경 지역을 ‘육우 사육’을 위한 목초지로 전환했다. 국제 소고기 시장을 겨냥한 이 들은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육우 생산 촉진을 위해 1971년과 1977년 사이에만 무려 35억 달러 이상의 자금적, 기술적 지원을 했다. 중앙 아메리카 영토의 상당 부분은 북아메리카에 값싼 소고기를 공급하기 위한 거대한 방목지로 전환되었고, 아마존의 열대우림 지역은 영국과 유럽의 소고기 수요을 충당하기 위한 방목지 건설로 불태워졌다. 이는 멕시코와 브라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년에 수백만의 국민들이 영양실조로 시달리는데, 소와 다른 가축들의 사료로 사용하기 위한 사료용 곡물 재배량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특히, 멕시코에서는 생산되는 곡물의 1/3 가량이 가축 사료로 사용되고 있다.

 

     농촌은 빠르게 붕괴되었고 삶의 터전은 물론이고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긴 농부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보호할 어떠한 수단도 없다. 그들은 하찮은 일자리라도 구하기 위해 인구가 밀집된 도시 지역으로 흘러들어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품꾼이 되거나,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불법체류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소고기를 먹는다는 것’, 곡물 사료로 사육된 육류를 소비한다는 것은 마치 어떤 권리행사나 누려 마땅한 생활방식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윤택한 삶의 상징처럼 인식되거나 고단하고 피곤한 일상에 대한 보상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육식 문화’의 이면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 많은 이들의 고단한 삶이 분명 존재한다. 그들의 괴로운 현실은 결코 드러나지도 않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거나 환기되지도 않는다. 육식을 즐기는 소비자들은, 현대판 식민화의 표본인 목초지와 축산 단지의 추악한 면모들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경제적,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이나 국가들간의 정치적 관계에 자신들의 식습관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전혀 모른다. 부자들의 다이어트와 빈자들의 굶주림 간의 모순만큼이나, 단백질 피라미드의 최상단과 최하단에 각각 위치하여 갈수록 양극화되는 시스템의 모순은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부의 양극화의 또 다른 버전이라 볼 수 있겠다.

 

     육식을 하지 않거나 줄인다는 것, 당연시하던 육식문화에 대해 적어도 한 번쯤 그 이면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는 나와 같은 한 인간의 삶에 대해 잠깐이나마 고민을 해본다는 것이다. 고향에서 쫓겨나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야 하는 아비된 자의 슬픔과 열악한 작업장에서 얼마 안되는 품삯으로 연명하는 저임금 노동자의 고된 삶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고, 그들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한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연대의식을 가지고 거대기업들의 횡포와 자본주의가 가지는 비인간성과 광기에 저항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까지도 내포한다고 해석하였다.


     육식을 지양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니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적어도 이 사실을 몰랐을 때와 알고난 지금, ‘육식’ 혹은 ‘육식문화’에 대한 인식변화를 스스로 인지하고 또 느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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