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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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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선진
댓글 0건 조회 5,882회 작성일 15-07-0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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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신지 14년이 되는 해다. 할머니는 갑자기 찾아온 뇌졸중으로 인해 오랜 기간 불편한 몸을 이끄시며 생활하셨다. 다리가 불편하셔서 내가 시골 할머니 댁을 찾아갈 때면 문지방 넘어 앉아 나를 기쁘게 맞아주셨다. 할머니의 병세는 더욱 악화 되어 지팡이는 휠체어로 바뀌게 되고, 할머니는 누워 계시는 일이 잦아지셨다. 결국 할머니께서는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평생을 넓은 시골마을에서 보내셨기에 병원에 계시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엉덩이 한쪽이 검게 썩어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집에 가자”라는 말을 반복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날이 갈수록 할머니의 의견이 완강해지기만 하셔서 할머니를 다시 시골집에 모실 수 밖에 없었고, 할머니는 집에 돌아오신 다음 날, 매일같이 앉아계셨던 시골집 안방에서 조용히 돌아가셨다.


하버드 의대 교수 아툴 가완디는 그의 저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통해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사가 되기 위해 생명을 구하는 방법만 배웠지 꺼져가는 생명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몰랐다는 저자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환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단순히 의술을 통한 생명연장이 아니라 환자의 행복한 죽음이 가능한가에 관하여 고민하고 있다.

현대 의학 기술은 의식이 없어지고 신체 기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각 기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람이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의술은 육체의 생(生)을 연장하여 준다. 저자는 과연 이것이 최선의 방법인지 의문을 품는다. 환자가 자기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수동적으로 생명을 연장 당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저자는 막바지에 이른 사람들에게 의학적 처방보다 인간다운 마무리를 짓게 하자는 것이 더 존엄한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년 겨울 즈음에 보았던 기사가 떠올랐다. 미국의 Brittany Maynard라는 여성이 그 해 4월 뇌종양으로 5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자, 남편 생일 다음날인 10월 1일을 존엄사일로 택해 당일 포틀랜드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복용함으로써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였다. 저자 아툴 가완디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다운 마무리’가 Brittany가 선택한 ‘존엄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환자의 관점에서 환자가 원하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일부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아름다운 죽음, 존엄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원하셨던 죽음이 바로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병원에서의 치료는 아마 할머니께서 이 세상에서 계실 수 있었던 시간을 늘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고통스러워 하셨고 항상 집에 가자고 말씀하셨다. 할머니께서는 시골집에 돌아간 바로 다음날 눈을 감으셨지만 내가 본 할머니의 모습은 평안해 보이셨다. 할머니께서는 하루 더 살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니라 일평생 살았던 마을, 당신께 가장 편안한 장소인 시골집에서 쉬고 싶으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와 죽음과 관련된 주제에 관하여 이야기 삼는 것을 꺼린다. 하지만, 어떠한 존재도 태어난 순간부터 나이 들다가 결국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삶에서 비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죽음에 관한 대화와 나다운 죽음을 맞이하려는 준비가 이렇게도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물론 죽음은 고통스럽고 두렵고 맞이하고 싶지 않은 일련의 과정이만,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이기에 지극히 정상적인 삶의 한 부분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외면하고, 자신의 생을 다른 사람의 처분에 맡겨 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지에 관하여 고민해야 한다. 고민의 결과가 Brittany와 같은 모습일 필요는 없다. 그녀와 똑같은 시한부의 삶에서 마지막까지 생에 대한 집념을 가지고 치료를 받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자기의 인생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으면 한다.

자신의 죽음에 관한 이러한 선택은 주체적이어서 아름다울 수 있다. 평소에 이러한 선택에 관하여 주변에 알려둔다면 의식이 없을 때 그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고민을 줄여줄 수도 있다. 마치 아름다운 여행계획을 짜는 것처럼 나의 아름다운 죽음을 미리 설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까지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떠한 자세로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할지 찬찬히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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