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용준
댓글 0건 조회 6,759회 작성일 15-07-01 22:51

본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_ 도스토예프스키


  어린 시절 나에게 아버지의 서재는 마치 금기와도 같은 곳이었다. 제목조차 이해할 수 없는 책들로 가득한 그 곳을 나는 중학생이 되어서야 아버지와 함께 처음 들어가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일주일만에 모두다 이해를 하고 온다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시겠다며 아버지가 나에게 쥐어준 책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작품이었다. 난생 처음 접한 문체와 단어들로 가득한 이 작품을 읽기만 하는데도 일주일은커녕 한달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당대 러시아 문학가들 작품의 특징이라고도 할수 있는 역사적배경을 바탕으로한 바람직한 청년상에 대한 외침이 주제가 된 풍자적 표현들에 나는 매혹되었다. 10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금 무엇인가에 홀려 잡게된 책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이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이 낳은 위대한 작가 중 한명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서거한지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작품 속에서 그의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는 작품세계를 통해 난해하고도 심오한, 인간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과 문제점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까라마조프가 구성원들의 미묘한 심리갈등묘사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어진다. 아버지 표도르와 큰 아들 드미뜨리, 둘째 아들 이반, 막내 알료사가 등장하고, 그들의 주변에는 항상 사생아인 스메르자꼬프가 등장하며, 이 작품은 ‘친부 살해’ 사건을 중심으로 한다. 작품의 시작에서 그루센키라는 여인을 사이에 두고 탐욕스런 노인 표도르와 큰 아들 드미뜨리 질투와 증오를 계속한다. 그러던 중 표도르가 살해되자 위의 갈등관계 때문에 드미뜨리는 범인으로 지목되게 되는데, 사실 친부 살해의 진짜 범인은 둘째 아들 이반의 사주를 받은 스메르자코프였다. 비록 드미뜨리가 범인은 아니었으나 스메르자코프의 자살로 인해서 드미뜨리 무죄를 증명하기가 힘들어졌으며, 드미뜨리 또한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시베리아 유배 길에 오르게 된다.


  작품의 긴박한 줄거리 뿐 아니라, 글에서 더욱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요소는, 온갖 모순과 비합리,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야기되는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만의 통찰력이다. 첫째인 드미뜨리는 미학적 인간으로써, ‘미’의 관념을 비단 마돈나의 이상이라 할 수 있는 성스러움에서만이 아닌, 소돔의 이상인 추악함에서도 찾으려 한다. 이러한 점은 드미뜨리가 미를 무서워하면서도 신비스러워 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둘째 이반은 매우 이성적이며 작품에서 무신론과 서구적 합리주의의 모습을 표현한다. 이반은 대심문관에 대한 이야기를 동생 알료샤에게 들려주며, ‘대심문관은, 무지한 인류를 영원히 사로잡을 수 있는 세 가지 힘-기적, 신비, 권위를 거부하고 지상의 빵 대신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함 으로써 그들을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그리스도를 비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겐 선택의 자유, 양심의 자유만큼 짐스러운 것은 없다’ 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반이 부정하는 것은 신이 아닌, 불합리하고 고통으로 가득 찬, 신이 창조한 세상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이반이 이러한 논리를 갖는 것은 그가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다. 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인간들에 대한 연민으로 천국 입장권을 반환하겠다는 말에서 그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막내인 알료샤의 모습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은데 작가는 이 인물을 통해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투영하려 한 듯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당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양면성과 그들이 갈구하는 자유를 억압받는 대가로 주어지는 경제적 풍요의 허상을 증오하였다. 그에게 희망이란 인간성의 부활이다. 즉, 그에게 천국은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변덕스럽고 불합리하며 아무런 힘도 없는 인간들이 자유로운 선택과 그 선택에 따른 고통과 수난을 거쳐 도달하게 되는 곳인 것이다. 드미뜨리가 작품에서 겪게 되는 많은 고통들이 있음에 진정으로 영혼의 부활을 얻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의 깊은 내면의 세계를 잘 꿰뚫고 있다. 인간의 내면을 관통하는 통찰력은 이 작품이 쓰일 당시인 19세기에서 뿐 아니라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듯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순은 시대를 초월하여 분명 현대사회에도 존재한다. 이러한 모순과 혼란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긴 시간이 지나 몇 세기 이후라 한들 그것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고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을 철렁인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표현되듯이 비록 모든 인간들이 이 가족 구성원들과 흡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형제들의 개성은 현대 사회에 존재할 수 있는 개개인의 인간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드미뜨리의, 결과만을 중시하던 미적 중심의 사고를 지닌 사람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지극히 논리적이고 자신의 주장과 관념을 끝내 관철하려는 지성 중심의 (이반과 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 또한 우리 주변에 다수 존재한다. 형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의 사고를 하는 막내 알료샤의, 신앙 중심적이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적이라 할 수 있는 사고를 지닌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끝으로 각 형제들의 제각기 다른 개성들을 조금씩 모아 모방하며 자신의 인생을 개선해 가던 스메르자코프의 모습도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통찰력이 20세기 혹은 19세기 작품들은 역사책에 불과하다는 현대인의 편견을 단번에 타파해버린 것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어느 세기, 어느 장소에서나 사람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논쟁거리이다. 정답을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정하는 방향타 역할을 해주며, 신에 대한 자신만의 논리는 세계를 바라보는, 사회를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는 눈을 제공해준다. 어떠한 입장이 옳고 그른지를 떠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깊은 통찰력은 여지껏 내가 한번도 깊게 생각지 못해봤던 물음에 대해 고민을 해볼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갈등과 고통에 대하여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은 조금이라도 위로를 얻고 다시금 인생에서 한발짝 내딛을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회의가 들 때 마다 나는 기꺼이 다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잡을 것이며 그곳에서 다시 고통을 발견하고 문제를 얻게 된다 하여도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인격체로써 누구나 겪고 또 딛고 일어서야할 하나의 계단이라 생각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