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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나를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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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위주형
댓글 0건 조회 5,763회 작성일 15-06-09 09:20

본문

 

< 데미안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한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

 

 

<데미안>의 가장 핵심적인 문구이다. 이 책은 주인공인 싱클레어의 의식 확장과 존재에 대한 접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어린 싱클레어가 성장하면서 겪는 많은 이야기들과 방황들은 복잡하게 얽힌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오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안의 사람들은 동굴안의 세계가 전부인 줄 착각하며 삶을 살아간다. 동굴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묶인 쇠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가기만 한다면, 그는 햇빛과 바다, 그리고 푸른 초원과 같은 동굴 밖의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에 대한 고통은 항상 수반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이라는 인물을 만나 동굴 밖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크로머의 덫에 걸려 악의 세계란 결코 접해선 안 될 것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악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 싱클레어는 선과 악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데미안은 이런 그에게 전복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일러준다.

 

우리는 어릴 적 부모님의 슬하에서 태어나 자라난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성장이 거듭될수록 우리는 부모님에게 의지하기보다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게 되고 때로는 부모님의 걱정 어린 조언에 화를 내기도 한다. 그 만큼 성장한 것이고, 그 만큼 부모님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고 ‘알’을 깨고 나오려 한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성장과 인식의 확장이 저자의 의도와는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이런 단순한 성장으로 기인된 인식의 확장에서 멈추는 대다수의 현대인들을 비판한다. 현대 사회의 흐름은 ‘자아의 실현’ 혹은 ‘존재에 대한 성찰’을 추구하기는커녕 자신의 욕구나 흥미에 대한 관심을 찾는 일 조차도 등한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한 ‘알에서 깨어 나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자신을 관찰하고 사회와 구조라는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싱클레어는 선이 강조된 기존의 가치관에서 카인의 새로운 해석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새로운 세계에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연스럽게 오는 성장의 결과가 아닌 끊임없는 생각과 고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생각의 피상적인 접근방식이 아닌 내면과 실재를 파악하는 인식과 성찰이라는 것이다.

 

토마스 쿤은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구조>에서 ‘패러다임’에 대해 설명한다. 패러다임이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인식되는 그 시대의 암묵적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모든 행성이 지구를 중심으로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천동설이 바로 그 당시의 패러다임이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회전하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며 기존 패러다임의 오류를 지적한다. 당시의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는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인식되었고, 그것은 일종의 죄악과도 같이 여겨졌다. 그리고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반론하게 되었고, 기존 패러다임을 단단히 했다. 결국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으로부터 먼 훗날에서야 채택되게 되었다. 쿤은 패러다임이란 한 순간에 변화하는 것이 아니고 패러다임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적 중첩과 반론으로 발전되어 나아가며, 기존 견해와 이론으론 더 이상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을 경우 변화한다고 말한다. ‘알’은 세계이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그러나 알을 깨고 나오는 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되는 것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끝없는 투쟁의 결과이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석양에 날기 시작한다.’라는 말처럼 싱클레어가 경험한 새로운 세계와 시각은 다른 이들에게 공감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고독한 그는 술로 위안을 삼으며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베아트리체를 연모하기도 하고, 아프락사스를 알아가기도 하지만 고독 속에 존재한다. 이처럼 알을 깨고 나오는 행위라는 것 자체는 투쟁이자 고난의 연속인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을 수 없다.

 

종교는 그 말속에서도 알 수 있듯 최고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학문의 모든 출발점인 진리에 대한 탐구가 바로 그것으로, 예수의 가르침, 붓다의 가르침 등 형식적인 그리고 피상적인 ‘표층종교’를 제외한 진정한 의미의 ‘심층종교’의 존재에 대한 접근이다. 결국 최고의 가르침은 종교라 할 수 있는 것이고, 이 때 ‘새는 신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신은 바로 아프락사스로, 그것은 빛이자 어둠이고 선이자 악이다. 선과 악을 구분 하는 반쪽 세계가 아닌 선과 악이 공존하는 완전한 세계이자 존재의 근원인 것이다. 어린 시절 지난 후 재회한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크로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크로머에 관한 언급이 없는 데미안의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데미안은 전쟁이 난 후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싱클레어에게 크로머의 기억을 묻는다. 싱클레어는 미소로 답하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 이후 나에게 일어난 일들도 고통스러움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가끔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나 자신의 내면의 세계로,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상이 졸고 있는 그곳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고, 다만 그 어두운 거울위에 몸을 굽히기만 하면 되었다.”

 

결국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혹은 아프락사스와 그리고 만물의 근원과 하나가 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모든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글을 쓰는데 이용되고 있는 컴퓨터의 존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부재, 곧 없음이 있기 때문에 존재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선이 있기에 악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고요가 있기에 소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결국 그 근원은 하나이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이 존재에 대한 접근이고 자신만의 자아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저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지금 우리의 삶은 너무나 각박하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존재에 대한 물음의 부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이러한 ‘울림’은 점차 줄어들어 귀를 의심할 정도이다. 세월이 흐르고 문명의 발달은 진척되었으나 그만큼의 정신적인 성숙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현대사회는 진리와 존재에 대한 물음은 계측되지 못하고,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등한시 했고, 존재와 진리 그리고 자아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이들을 정신병자처럼 취급한다. 이런 세상 속에서 ‘카인의 표식’을 지니는 삶은 굉장히 어려우며 어쩌면 이룰 수도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썩어빠진 세계가 스스로 변화하고 카인의 표식을 지닌 자들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데미안의 예측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어미새가 알을 품듯 존재의 근원은 우리를 품고 있으며 분리 될 수 없는 진리이다. 품어도 부화하지 않는 알은 잘못 된 것이 분명하며 단단한 껍질을 깨기 어렵다는 이유로 알 속에서 썩어가는 새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알을 깨려 투쟁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성찰이 그 투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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