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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에 중독된 젊은이들이여, 분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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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위주형
댓글 0건 조회 4,331회 작성일 15-02-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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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하라 >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노조사태, 남양유업의 갑을 횡포, 세월호 참사,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 정부의 건강보험료 개편안 백지화... 과거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에는 ‘분노’를 일으킬만한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은 짧게는 1주일... 길게는 1달 정도면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리고 비슷한 사건은 어김없이 또 다시 반복해서 일어난다. 그리고 또 다시 잊혀져 간다. 이러한 반복되는 사건들의 배경에는 대한민국 국민, 특히 가장 활발하게 대응해야 할 젊은 세대들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출간 7개월 만에 200만 부를 돌파하며, 프랑스 사회에 ‘분노 신드롬’을 일으킨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전직 레지스탕스 투사이자, 외교관을 지냈으며 퇴직 후에도 인권과 환경 문제 등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프랑스 사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담아낸 책이다. 저자는 전후 프랑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레지스탕스 정신이 반세기만에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프랑스가 처한 여러 가지 문제에 ‘분노하라’고 일갈한다. 무관심이야 말로 최악의 태도이며 인권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고 뜨겁게 호소한다.

 

이 책에서, 프랑스의 애국투쟁인 ‘레지스탕스’는 저자가 가진 저항정신 그 자체로 독자에게 와 닿는다. 저자인 스테판 에셀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나치즘, 파시즘,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에 젊음을 바친 이로, 레지스탕스 세력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프랑스 건설의 주역이 됐을 뿐 아니라 세계 인권 선언 초안 작성에도 관여했다. 역사적인 흐름으로 봤을 때 당시 레지스탕스가 민중들에게 선사한 것은 인간의 자유를 최대화 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를 토대로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이 세계 2차 대전 당시 민중을 이끌었던 ‘레지스탕스’의 원칙과 가치임을 역설한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가 인간의 존엄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꼬집는다. 저자는 ‘레지스탕스’의 근본이념에 대해 파고들어가면서 궁극적인 레지스탕스의 동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레지스탕스의 근본이념에 대해 ‘분노’라는 결론을 내린다. ‘분노’란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는 방법이자 일반 시민이 권리를 찾을 수 있었던 레지스탕스의 기본이념이다. 그래서 그는 독자에게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며 ‘참여하는 투사’가 될 것을 권유한다.

 

<분노하라>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할 만 한 점은, 저자는 현대의 젊은이들이 ‘분노 할 수 있는 힘’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라는 소제목과 함께 레지스탕스가 활발히 움직이던 1940년대의 젊은이들이 읽어낸 사회의 흐름은 ‘분노’로 발전했고 이는 곧 인권의 존엄을 지키고,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토대를 다졌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레지스탕스 세대의 청년층은 인간사회의 성장이라고 평가 할 수 있을만한 거대하고 숭고한 과업을 이뤄냈으나 현대의 젊은이들은 지나친 경쟁만을 부추기는 대중과 언론매체에 의해 ‘분노’를 잊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20대 청년층의 태도에 대해 한 번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대통령 선거 투표율만 보더라도, 20대는 60%로 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이는가 하면, 20대의 정치 무관심이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문제에 관해 한 세기를 살아온 지식인다운 차분함을 보인다. 그의 20대가 나치와 파시즘에 대한 분노였듯, 현대의 20대가 겪어야 할 분노의 대상이 사회의 양극화, 반인륜적 범죄, 환경 문제들이라고 단호히 지목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원망은 없다. 차분하고 여유롭기까지 하다.

 

또, 그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독립된 언론이다. 레지스탕스는 이 사실을 알고 강력히 요구했으며 ‘언론의 자유, 언론의 명예, 그리고 국가, 금권, 외세로부터 언론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지스탕스에 이어 1944년부터 각계각층이 언론에 대해 줄곧 주장해온 바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바로 이 ‘언론의 독립’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라고 외친다.

 

물이 그렇듯 한 곳에 고여 있으면 썩는 것이 ‘권력’이다. 이 국가 권력이 쥐고 있는 힘을 견제하고자 나타난 것이 ‘언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은 독립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오늘 날 한국 언론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민주주의’라는 기반 위에 서 있는 나라라 명하기가 무섭게,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먼저 언론을 포섭하거나 탄압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즉,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아야 하는 ‘언론’이 정치와 경제라는 거대 권력 앞에서 홀로 서지 못하고 결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분노하라_세계 언론 자유도.jpg  

 

위의 그림은 ‘국경 없는 기자회(http://rsf.org/index2014/en-index2014.php)’에서 발표한 전 세계 언론자유도이다. 그림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언론’이 자유롭지 못한 나라가 대다수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언론은 세계 57위 수준을 기록했다. 이 수치는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비슷한 수치로 선진국 반열에 오른 경제 대국임을 무색하게 만든다.​

 

앞서 말했듯이, ‘분노’의 시발점을 열 때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문학’이다. 하지만, ‘분노’의 선동자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언론기관’ 이다. 잘못된 것을 꾸짖고, 국민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언론은 이미 죽어있어서 젊은 세대들에게 선동은커녕 단절만 시키고 있다.

 

선동가로서, 또 지식인으로서 살아온 저자는 “이제는 효율적으로 활동하려면 네트워크 단위로 행동하면서 현대적인 소통 방식까지 두루두루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현대 사회에 걸맞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제 대한민국의 20-30대는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왔다. 무관심과 앞으로만 달려가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분노’해야 할 때임을 스스로 깨닫고 다양한 소통방식으로 ‘레지스탕스’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원칙과 가치를 다시 한 번 우리 사회에 실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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