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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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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형도
댓글 0건 조회 3,849회 작성일 15-01-31 22:36

본문

   

         하필이면 시간, 공간, 인간이란 단어에 계(界)가 아닌 간(間)을 쓰는 걸까. 만약 그 이유가 한자 그대로 틈(間)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 아마도 시, 공, 인 각각 그 안에서는 물론 삼자 상호간에도 어떤 틈이 놓여 있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흐르는 시간, 처해 있는 구체적·추상적인 장소나 처지 혹은 입장, 타인의 감정이나 목숨 등을 어찌 인간이 그 틈을 넘나들겠는가.

         
        한편, 가끔은 삶을 포함한 모든 것이 덧없음을 느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사는 게 무슨 의미일까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고 주어진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그런 허무감이 내 목을 죄어 올 때가 있다. 가끔 산에 오르면 문득 산사로 난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심결에 합장해보지만, 마음속 번뇌를 씻고자 눈 감는 것 또한 욕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에는 차라리 지옥 같은 세상 그 불구덩이 속에서 몸과 마음 모두 데이다 못해 태워지고 끝내는 몇 줌의 재로 흩어져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도 구도의 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마음속에 또 다른 철심을 박아보기도 하는 난 어리석고 약한 존재다. 그러나 광대한 우주에 티끌 하나 그냥 있는 법 없듯 나 역시 분명 이 장소에 놓여있는 까닭이 있을 터...


         요컨대 '오즈의 마법사'의 결말은 허무했다.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던 그는 사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사기꾼이었던 것이다. 내 무의식의 작용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읽은 책의 저자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꽤 오랜 시간 동안 저 이야기의 결말이 ‘전능한 오즈를 만난 도로시 일행이 소원을 이뤘다’는 해피엔딩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가 제법 굵어진 나이가 되어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산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초등학교 2학년 때와 같은 큰 충격을 받았다.


         오즈와 같은 전능한 존재는 사실 이 세상에 없을 뿐더러, 설령 그렇다하는 존재를 발견한다 한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는 씁쓸한 진리가 이 이야기의 교훈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 네 명이 갖고 싶어 했던 용기, 마음, 지능 등은 사실 이들 스스로가 이미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은 그것들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 뿐, 오즈가 사기꾼이었다는 것과는 별개로 결코 보상받지 못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삶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임을 느낀다.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초라한 결승점이 나를 기다린다 한들, 내가 그 종점에 도착하기까지 걸어왔던 지난날의 시간들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닐 것이다. 남들이 아무리 볼품없는 탑이라 손가락질해도 나의 관점에서 나의 느낌으로 세워 올린 탑을 보고 감상할 수 있노라면 그걸로 된 것이다. 어차피 결국엔 흙으로 돌아가는 게 삶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해보면 중요한건 여정이지 도착점이 아니다. 그 말인즉 지금 살고 있는 매순간이 여정의 일부이지 결코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길은 다르기 때문에 고생하는 시기도 저마다 다를 수도 있다. 30대가 되서 뭘 이뤘다는 둥 50대가 되서 뭘 했다는 둥의 이야기는 자신의 길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감사하고 칭찬하는 데는 필요 할지 모르겠으나, 그걸로 비슷한 시기에 뭔가를 이루지 못한 남들을 무시하여 자신의 우월감을 충족시키는 필요는 없다.

 

        따라서 언급한 것처럼 덧없음을 느끼기보다는,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부질없는 미련을 두거나 시기심을 가지기 보다는 그저 물 흐르는 대로 자연스레 나의 몸을 내맡긴다면,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이 아닐까. 어차피 이들은 나와의 사이에 어쩌면 신조차 넘지 못할 거대한 틈이 있는 외물(外物)이니까. 다시 못 오는 젊음에, 잘 나갔던 시절에, 지위에, 계급에, 돈에, 명예에, 사랑에, 믿음에, 신망에, 감정에 얽매이지 앉는 것. 다시 말해 외물에 지나치게 나를 구애시켜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이런 틈이 있기에 나란 존재는 그 어떤 것들도 넘볼 수 없는 독존적인 소중한 존재임을 돌이켜 볼 수 있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하고 싶다'라는 느낌 자체는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을 매일 만나거나 혹은 어떤 일을 매일 하다 보면 짜증나고 화날 때가 부지기수다. 처음 느낀 기쁨과 설렘은 사라지고 후회와 실망만이 점점 커져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래도 그 순간을 참고 해 나가는 것은 의지일 것이다. 사람은 변해야 한다. 그러나 변화의 대상은 시각이나 방법에 관한 것이지 결코 그 의지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나 행복에 목말라 하면서도 환경과 물질같이 내면 바깥에 존재하는 외물에 대해서만 탓하는 우리들의 문제는 아닐까. 
          허나,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은 과연 몇이나 될까. 성직자들 정도? 그들조차 그것을 다 털어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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