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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 그리고 규범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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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호석
댓글 0건 조회 977회 작성일 25-09-1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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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 그리고 규범의 필요성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을 읽고-

 

 

2025년 9월 10일, 보수 성향 활동가 찰리 커크(charlie kirk)가 유타 밸리 대학 행사 중 총격으로 사망했다. 백악관은 9월 14일 일몰까지 조기 게양을 명령했고, 여러 프로스포츠 경기장에서 묵념이 이어졌지만, 일부 구단의 경기장은 별도의 추모를 하지 않았다. 같은 상징(국기·스타디움) 안에서조차 ‘누구의 죽음이 공적 애도의 대상인가’가 정치적 소속에 따라 달라졌음을 보여줌으로써 미국 사회의 균열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한편, 사건 직후 온라인에는 상호 비난과 음모론, ‘상대 진영의 책임’ 공방이 급속히 번졌다. 비인간화와 도덕적 이중기준은 애도의 언어까지 점령했고, 심지어 ‘죽음을 기뻐하는’ 반응도 포착되었다. 이처럼 정치적 부족주의가 감정의 분배까지 재단하는 장면은, 개인의 슬픔이 아닌 ‘진영의 자산’을 놓고 다투는 집단심리의 전형이다.

 

소설은 전시 대피 도중의 비행기 추락으로 소년들이 태평양의 한 섬에 표류하면서 시작된다. 어른 생존자는 없고, 아홉 살에서 열세 살 남짓의 소년들은 살아남는 법을 빠르게 배워야 한다. 랄프(Ralph)와 잭(Jack)은 무리의 두 ‘우두머리형’ 소년이지만 우선순위를 두는 본능이 매우 다르다. 그리고 피기(Piggy, 뚱뚱하고 심한 근시를 가진 인물로 표현된다)는 가장 사려 깊고 이성적이며 자기 인식이 뛰어나지만, 권력을 행사할 리더십은 부족하다

처음에 소년들은 랄프를 중심으로 조직을 갖추려 한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구조되고 그때까지 살아남아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나 잭은 그렇지 않다. 그는 랄프가 도입하려는 규칙과 규율에 관심이 없고, 그의 우선순위는 재미와 동물 사냥, 즉 고기를 먹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특히 어린 소년들 사이에서 사기가 떨어지고 공포가 커진다. 그들은 섬의 어둠과 울창한 숲, 그 안에 도사린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자신들을 노리는 끔찍한 ‘짐승’을 상상하게 된다. 이 때부터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하고 강한 본능이 표면화된다. 잭과 랄프 사이의 권력 투쟁은 점차 격화되고, 두 리더를 중심으로 파벌이 생기며 행동은 점점 더 무모해진다. 섬세한 성격의 또 다른 큰아이 사이먼은, 밤에 진영으로 다가오던 그를 잭의 무리가 두려워하던 ‘짐승’으로 착각하면서 집단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한때 학교 친구였던 이들의 손에 사이먼이 죽자, 마치 병에서 나온 지니처럼 야만성이 더욱 풀려나게 된다. 오직 피기만이, 그리고 그것을 말로 분명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도, 그들이 처한 위험이 ‘바로 그들 자신’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결국 피기 역시 랄프와 잭의 싸움을 말리려던 중 로저(Roger)가 굴린 바위에 맞아 숨지게 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랄프는 때무침 온 해군들에 의해 구조되며 소설은 마무리 된다.

 

 

「파리 대왕」이 비추는 거울

1950년대 초에 쓰인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인간이 얼마나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문명의 표피를 살짝만 긁어도 대부분의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본능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등장한 소년들은 문명의 감시와 제도가 사라지자 곧장 두 갈래로 갈라진다. 랄프가 상징하는 생존·구조·규칙의 질서는, 잭이 자극하는 사냥의 쾌감과 결속 앞에 점점 밀린다. 사이먼의 오인 살해, 피기의 폭력적 죽음은 “짐승은 바깥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다”는 통찰을 실감으로 바꾼다. 소설이 말하는 ‘문명의 얇은 껍질’은, 오늘의 추모 장면에서도 쉽게 벗겨진다. 애도의 보편 윤리가 ‘우리 편’이라는 표식에 의해 곧장 조건부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잭의 가면을 쓰고 사냥을 나선다.

랄프의 조개껍데기(규칙의 상징)가 깨지듯, 현대사회에서도 제도·의례·예절은 정치적 고양 앞에서 쉽게 무력화된다. 그때 남는 것은 ‘누가 내 편인가’라는 단순한 나침반은 바로 골딩이 경고한 원초적 본능의 방향 감각이다.

 

 

무조건적 규범

도덕심리학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기 집단을 편애하고 바깥집단에 냉담해지기 쉽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회는 본능의 기울기를 교정하는 상수(constant)를 필요로 한다.

십계명 6계명의 핵심 “생명을 존귀히 여길 것”은 ‘누구의 생명이냐’를 묻지 않는 보편 명령이다. 정치적 선호나 공적 평가(그의 말, 그의 정책)와 무관하게, 살해·폭력 자체를 금하고 죽음 앞에서의 존엄을 지키라는, 일종의 맹목적이되 보편적인 규범이다. 오늘의 사례에서 보듯, 규범이 조건부가 되는 순간 애도는 곧 정치 퍼포먼스로 전락한다.

물론 ‘무조건성’은 불편하다. 어떤 인물의 생전 행적에 분노하는 이들에겐 ‘그조차 애도해야 하는가’라는 저항이 생긴다. 하지만 보편 규범의 진짜 시험대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선다. “내 편의 죽음만 슬퍼한다”는 습성을 넘어설 수 없다면, 우리는 잭의 북소리에 언제든 다시 모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 진영을 굴복시키는 더 큰 함성이나 더 화려한 의례가 아니라, 편 가름을 불문하는 최소한의 절대 규범이다.

생명 앞의 침묵(묵념), 폭력에 대한 비타협적 거부, 사망자 비하의 금지 같은 간단하지만 ‘맹목적’인 금령들. 그 규범이 유지되는 한, 우리는 문명의 불빛을 꺼뜨리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에서만, 서로의 죽음을 ‘우리 편, 남의 편’으로 나누지 않는 사회적 애도를 배울 수 있다.

 

 

이 소설은 아이들이 독립해 가는 이야기 이상이다.

무엇이 비도덕인지를, 그리고 악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더 깊고 미세한 층위를 품고 있다.

우리는 내내 랄프, 피기, 잭, 다른 소년들의 선택과 행동을 되묻게 되고, 마침내는 벌어진 일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지점에 이른다.

결국 원초적 본능 앞에서 순수는 상실되고, 소년들의 삶은 다시는 예전과 같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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