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댓국을 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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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말수가 준 것 같다. 누가 말을 걸어와도 무의식 중에 말을 자르거나, 단답으로만 대답하고 만다. 사람과 마주 앉아 있는 시간조차 버거워져서, 오래전에 잡았던 친구들과의 약속마저 내게 큰 숙제처럼 느껴졌다. 그날도 겨우겨우 일정을 마치고 나니, 일종의 고요함만을 마음 속에 쌓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종로 쪽으로 몸을 틀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곳엔 사람과 거리 둘 수 있는 골목과 돌담, 익숙한 낯섦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묘 돌담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피해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찾으러 나선 것도 아닌데, 발걸음은 생각보다 멀리까지 이어졌다. 오래 걷다 보니, 머릿속에 켜켜이 쌓였던 것들이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발바닥이 아플 무렵에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가을비는 조용히 내리고 있었고, 나는 젖은 풍경 속에서 조용한 해방감을 느꼈다.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감정이 나를 감쌌다.
길가에 보이는 아무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를 시켰다. 사람들 목소리가 잔잔히 깔리는 공간 한 켠에 앉아, 무심히 일기를 썼다. 감정을 정리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냥 '있었다'는 걸 적고 싶었다. 이 하루가, 이 조용한 걸음이, 괜찮았다고 나중에라도 기억하고 싶어서. 그러다 배가 고파 문득 들어간 곳은 허름한 순댓국 집이었다. 간판도 희미했고, 가게 안엔 낡은 의자와 밥을 조용히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고요함이 좋았다. 나도 그들 틈에 조용히 앉아 순댓국을 시켰다.
순댓국을 먹으며
-정호승-
비오는 날이면 순댓국을 먹는다
겨울비 오는 날에는 파전에 막걸리가 좋지만
봄비 오는 날에는 순댓국이 좋다
순댓국을 먹으면 그치지 않는 눈물이 그친다
죽은 팔다리에 새순이 돋아
봄눈 내리는 보리밭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순댓국에 소금을 조금 타서 먹으면
과거를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이별이라는 과거도 아름다워진다
순댓국은 서로 겸손하다
순댓국은 스스로 낮아지고 가난하다
순댓국을 먹는 사람들은 평화롭다
국물이 뜨거웠고, 어딘지 모르게 위로 같았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되는 식사, 사람들이 각자 조용히 식사에 몰두하는 공간. 그곳에 앉아있으니 내가 조금 덜 지친 사람처럼 느껴졌다. 뭔가를 극복한 것도, 해결한 것도 아니지만, 그 하루를 무사히 건넜다는 감각이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들었다. 국물 한 숟갈에 하루가 정리되는 기분. 오랜만에 조용한 안정을 느낀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산 너머로 가로등 불빛이 번졌다. 다 젖은 신발이 불편했지만, 마음만은 조금 가벼워진 상태로 걷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날의 시간은 분명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아무 기대 없이 걸었고, 아무 기대 없이 들어간 식당에서 나는 근래 가장 편안하고 안온한 느낌을 받았다. 인생은 비 오는 날의 순댓국처럼, 별것 아닌 것들이 때론 마음을 가장 뜨겁게 데워주는 행위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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