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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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 안경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며칠 전, 한 개그맨의 음주운전 사건을 신고한 그의 지인인 A씨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신고자의 신원은 밝힐 수 없다”고 했지만, 일부 언론은 A의 이름과 관계를 공개했다. 한 연예매체의 기사 한 줄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익명 게시판에는 억측이 뒤섞였다. 사건의 본질보다 사람들은 더 자극적인 이야기, 더 분명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를 원했다. 그 결과, 한 개인의 삶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소비되는 이야기’로 전락했다.
이 작품은 1970년대 독일 바더-마인호프 단체의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가 한창일 때 출판되었다. 어느 날, 한 은행이 털리고 경비원이 살해되었다. 다음 날, 아무런 증거도 없이 독일 최대의 신문, 빌트지는 이 사건의 범인으로 그 단체를 지목했다.
소설은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이 형사 뫼딩을 찾아가 “내가 기자(퇴트게스)를 죽였다”라고 자백하면서 시작된다. 블룸이 무슨 이유로 퇴트게스를 죽였는지 사건의 전말을 시간순으로 되짚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어느 날 밤 파티에서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는데, 그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는 테러리스트였지만 그 사실을 숨긴다. 그녀는 그와 하룻밤을 보내고, 그가 도망친 뒤 체포되어 언론으로부터 즉시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힌다. 경찰은 용의자를 잡으라는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고, 그녀는 그 압박의 상당 부분을 직접 견뎌야 했다. 그녀의 아파트는 뒤집히고, 거칠게 다뤄지며, 모욕적인 심문을 당하고, 사생활은 철저히 파헤쳐졌다. 그 경험은 굴욕적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도 이해한다. 서투르지만 경찰은 나름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대중 언론의 보도 태도였다.
그녀의 사건을 맡은 기자와 사진기자는 그녀를 염탐하고, 존재하지도 않은 발언과 사건을 꾸며내며, 심지어 죽어가는 어머니의 병실에 침입해 임종 직전의 발언을 얻으려 한다. 신문 1면에는 날마다 그녀의 사진과 함께 선정적이고 대부분 허구적인 성생활, 정치 성향, 도덕성에 대한 기사들이 실린다. 원래 그녀는 조용하고 예쁘지만 조금은 평범한 여성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악명 높은 존재가 되었고, 낯선 사람들로부터 증오를 받는다. 참다 못한 그녀는 신문사 기자인 퇴트게스와 개인 인터뷰 약속을 잡지만, 그는 그녀를 조롱하는 말만 내뱉는다.
그녀는 개인 인터뷰 대신 그를 총으로 쏴 죽인다.
“우리는 진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황색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들,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지는 정보의 왜곡과 날조, 이를 통한 여론의 조작과 선동은 과거만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정치적 목적을 가진 언론의 왜곡보도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만큼 성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40여 년 전 하인리히 뵐로 하여금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인물이 탄생하도록 만들었던 독일 황색언론의 행태는 오늘날 조금은 다른 형태로 목격된다.
황색언론의 위험한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서민적인 언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카타리나 블룸이 겪은 비극의 핵심은 ‘진실’이 아니라 ‘명예’의 붕괴였다. 그녀는 경찰의 거친 수사보다 언론의 무자비한 보도에 더 큰 상처를 입는다. “진실을 밝히기 위한 보도”라는 명분 아래, 기자들은 그녀의 침묵을 해석하고 사생활을 조각낸다. 하지만 진실이란 본래 완전하지 않으며, 그것을 다루는 태도가 곧 사회의 윤리 수준을 결정한다. 진실을 향한 열정이 타인의 존엄을 짓밟는 순간, 그 열정은 정의가 아니라 폭력이 된다.
“우리는 진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이 질문은 반세기 전의 독일뿐 아니라, 오늘의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진실은 중요하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태도는 더 중요하다. 누군가의 명예를 짓밟으며 얻은 진실이 과연 진실일 수 있을까.
카타리나 블룸이 잃은 것은 단지 사회적 평판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이었다.
황색 언론이 아닌, 황색 안경
오늘날의 ‘빌트지’는 특정 신문이 아니라, 수많은 SNS 계정과 댓글창으로 형태를 바꿔 존재한다. 과거에는 기자의 펜이 명예를 파괴했다면, 이제는 수많은 손가락이 스마트폰 화면 위에서 같은 일을 한다. 언론의 폭력은 더 이상 제도 밖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심히 누르는 화면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황색 언론’의 시대에 살지 않는다. 대신 ‘황색 안경’을 쓴 독자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극적이고 분노를 유발하는 기사가 클릭(수요)를 얻는 세상에서, 언론은 독자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문제는 그 거울이 일방향이 아니라는 점이다. 독자는 언론의 기사를, 왜곡을 소비하며 스스로의 확신을 강화한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아야 할 것을 묻고, 확인하지 않아야 할 것을 단정하며, 공감이 아닌 판단의 속도로 뉴스를 읽는다.
그렇게 언론의 폭력은 ‘보도의 문제’에서 ‘인식의 문제’로 옮겨왔다.
“황색 언론”이 누군가의 명예를 짓밟았다면, “황색 안경”은 그 명예를 기꺼이 외면한다.
결국 언론이 타락한 사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진실을 보고도 자극만 선택하는 우리의 눈이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사실이라 불리는 것조차 한 번 더 멈춰 서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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