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 밀란쿤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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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이나 현상, 문제에 대해 평가하면서 '정체성'이란 말을 일상적으로 많이 쓰고, 그것을 화두로 삼곤 한다. 하지만 거기에 부여하는 의미와 가치 정도는 얼마만큼일까? 정체성의 사전적 의미는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플라톤은 존재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이데아의 개념을 끌어들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비판하며 4원인론과 가능태·현실태의 개념을 통해 변화하는 세계를 설명했다. 이런 어려운 주제를 많은 작가들이 다루곤 하는데 이 작품에서 밀란 쿤데라는 어떤 관점에서 정체성을 바라보았을까? 밀란 쿤데라는 이 작품에서 자아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사랑을 들고 있다.
소설에는 한 남자(장-마르크)와 한 여자 (샹탈)이 나온다. 장-마르크와 샹탈의 시점을 번갈아 가며 진행시킴으로써, 하나의 사건을 두 개의 시선으로 교차시켜 보여 주고 있어서 이채롭게 느껴 졌다. 동거관계에 있는 샹탈과 장-마르크가 편지로 인한 오해 때문에 헤어졌다가 재결합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어느 날 휴양지에서 그들은 사랑에 혼선이 생기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장-마르크는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문득 낯설어 하고 당황한다. 샹탈 역시 거리를 걷다 어떤 남성도 자신에게 눈길을 던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체성의 불안을 느끼며 깊은 슬픔에 빠진다. 어느날 문득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연인 샹탈을 위로하느라 장-마르크는 장난삼아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 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라는 익명의 편지를 보내는데, 이 편지가 샹탈의 상상력에 불을 지핀다. 샹탈은 거듭되는 익명의 편지를 속옷 선반 속의 브래지어 밑에 간직하고, 장-마르크는 샹탈의 반응을 확인하느라 옷장을 뒤진다.
한편 샹탈은 그가 자신을 엿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편지의 출처가 그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그가 그녀에게서 홀가분하게 벗어나기 위해 편지를 쓴 것으로 오해한다. 장-마르크 역시, 그가 만든 가공의 인물에 불과한 허상에다 마음을 뺏기고 있는 그녀에게 질투와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다가 제각기 런던으로 떠난 그들이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화해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작가 밀란 쿤데라는 마지막 부분에서 갑자기 꿈을 끌어들여 독자의 뒤통수를 친다. 도대체 어디부터가 꿈이었는지. 편지 사건 자체가 꿈일지도 모른다고 까지 암시하여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장자의 호접지몽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다. 현실이 비현실로, 사실이 몽상으로 변했던 정확한 경계선을 작자는 능청스레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샹탈의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에요. 쉴새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요.'하는 마지막 말만을 이명처럼 남기면서...
사랑으로 샹탈의 변형된 얼굴에 잃어버린 옛 모습, 잃어버린 정체성을 불어 넣어 주려 했던 장-마르크. 결국 샹탈의 정체성은 사랑 받고 있다는 감정에 의해 고무되고 일깨워 진 셈이다. 밀란 쿤데라에 의하면, 여자들은 노화의 정도를 남자들이 그들에게 표출하는 관심, 혹은 무관심의 척도로 가늠하고 있다고 한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라는 말은 육체의 점진적 소멸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경고인 셈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꿈을 버려 가는 일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더 이상 모험을 하지 않게 됨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으려나. 늙는다는 사실에 초조해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직 남자들의 나이 듦은 연륜으로 보고, 여자들의 나이 듦은 그저 늙어 감을 뜻한다고 보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회인지라, 특히 여자들에게 있어서 젊지 않다는 건 치명적인 상처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야기로 보여 지지만, 철학적인 면이 내포되어 있어서 그 사랑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주인공 샹탈과 장-마르크를 통해서 잘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인물들간의 관계에 대해서 감정묘사가 매우 탁월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이 삶에 주는 영향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현실을 통찰하게 하는데 뛰어난 작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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