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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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안의 파시즘 - 임지현 外
일상생활처럼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이어지면서 어느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힘이 존재한다. 임지현 작가는 이러한 힘을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굴종하게 만들어 일상생활의 미세한 국면까지 지배권을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규율’이라 표현했다. 법제적 민주화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무늬라면, 파시즘은 물밑에서 살아 움직이는 한국 사회의 결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작가는 이를 일상적 파시즘이라 규정하였다. 즉,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따라왔던 규범이나 규칙들은 사실, 상위 층에서 일반인을 지배하기 위해 강요해 온 고도화 된 하나의 장치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측면에선 교수와 학생, 더 나아가자면 그들이 이루고 있는 일방적인 수업 방식, 전체적인 측면에선 어렸을 적 학교에서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했던 국기에 대한 경례 등이 파시즘적 요소를 포함한 예로써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이 일상적 파시즘은 작게는 개인, 크게는 사회 혹은 국가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고 작가는 언급한다. 즉, 파시즘이란 상당한 부분에 뿌리내려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해석해보면 이것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문화를 형성하고 다듬어 왔기에, 우리는 그 문화 속에서 이미 파시스트가 되어있던 셈이라 할 수 있다. 파시즘은 사람들의 집단적인 기억을 조작하여 현실을 이해하는 틀을 제공하였고, 우리는 그 안에서 현재에 적응한 셈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인지하기 힘든 파시즘이 사실은 극복의 문제라는 것이다.
작가는 개인적인 측면의 파시즘이 사실 한 사람의 맹점을 보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멀지 않은 때에 이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과거 내 주변에는 사람을 마치 물건 다루듯 하는 인간들이 있었다. 작가의 의미를 담아 결과론 적으로 언급하자면, 나는 기억상 그런 파시스트들에게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 또 가끔은 내 자신이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난 뒤, 그런 인간들의 작태를 보아하니 대개 그 인간들 자체가 자아가 허하여서 자신의 힘이 아닌 남의 힘으로 먹고 살려는 기질이 강함을 알게 되었다. 초라한 건 내가 아니라 사실은 그들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나는 그들을 경멸하는 마음을 거두고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남들 앞에 당당할 자신감조차 없이 자신의 공허함을 숨기고 남들을 이용하려는 그들이 불쌍하게 느껴진 것이다. 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나만의 잠재력을 조금씩 발견하게 되었을 때, 드디어 그들이 보여주는 그런 얕은 싸구려 행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내 자신의 모습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이 때, 술이나 게임 혹은 미인들이 주는 일시적인 것들보다는 담백하고 강렬하진 않지만, 보다 고차원적이고 내 인생 마지막까지 이어질 지속적인 환희를 맛보게 되었다. 어찌 보면 작가와 같은 맥락에서 파시스트를 받아들인 셈이다.
하지만 어떠한 무엇을 언급할지언정 우리 사회에서의 진정한 파시즘의 예는 선거 아닐까? 총선마다 확인할 수 있었던 영남권과 호남권의 지역주의가 그 예이다. 연고지 후보자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고 특정 후보를 배제하는 이 흐름은 그 지역 내 문화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일반 대중의 심리가 포함되어 있다. 후보자에게 각종 부정부패가 있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그들을 밀어주는 것이 애국이라고 믿는 일종의 신념이 그들에게는 존재한다. 이러한 것들에는 알게 모르게 작용한 일상적으로 스며든 파시즘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제일 중요한 것은 어찌 보면 믿음이다. 믿음은 사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고립되지 않으려는 두려움의 심리로부터 기인한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 종교전쟁, 당파싸움, 그리고 살면서 겪는 크고 작은 분쟁 등등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믿음이란 것의 힘을 가늠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뿌리 내린 것이 파시즘이다. 전례로 살펴보자면 다양한 믿음들이 대립 각을 세우고 있는 시점에서 평화로운 방식으로 합의점을 찾은 경우는 드물다. 한 개인의 믿음을 바꾸는 것은 누구들을 보자면 목숨을 취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일개인의 사상이 아니라 정체성이자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종교에 매달리고 정치에 참여하고 하는 것은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때문에 외부로부터 믿음이 공격받을 때 그토록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은 단순히 자만심 때문이 아니라, 한 개인의 존재 이유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너지면 자신도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에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했더라도, 무너질 두려움에 차마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 이것이 파시즘의 무서움이리라. 따라서 저 사람이 나와 다른 것을 믿거나 심지어 그것에 미쳐 맹신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그를 지탱해줄 수 있다는 것이라면, 교도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단 일단은 이해해주고 품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지나치게 이상주의자 같은 얘기일까? 결국 세상은 지분싸움의 연속이요, 잘 생기고 돈 많고 목소리 큰 놈이 갑인 것일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먼지바람 속이다.
파시즘은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인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씁쓸하게도 우리는 역사와 함께한 이 요소를 어느 정도 인정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는 변한다. 극단적인 예로 영남권과 호남권을 들었지만, 사실 최근에 들어서는 이러한 대립각도 예전만하지는 않다. 이 모든 것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려니. 그러므로 경계를 늦추지 말고 늘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라고 말이다.- 이전글비디오 게임 1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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