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 (In The Woods,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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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In The Woods, 1950)
요즘 나라 안이 매일매일 시끄럽다. 항상 시끄러웠지만, 최근에는 어처구니 없게 돌아가는 상황에 많은 사람들의 체념과 안타까움에 곳곳에서 한숨이 들리고, 적극적인 구조 활동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고, 거짓된 정보에 대한 진실의 요구가 넘쳐나고 있다. 아직 정확하게 법정 결론이 난 것은 아니지만, 수백 명의 안타까운 희생자가 생겨난 ‘세월호’ 사건은 현재 대한민국의 총체적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핵심은 바로, 누가 배를 전복되게 만든 것인지, 사고 뒤의 승무원들의 행동과 구조기관에서의 초기 대응은 어떠했는지, 사체를 수습하는데 어떠한 문제점이 있었는지 등의 ‘진실’이다. 비단 이 사건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는 ‘진실’을 밝혀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 모든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증거가 매우 부족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오래 전에는 정보 전달력과 증거 수집을 위한 기술의 한계로 증거 확보가 어려우며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기 어려운 시대였지만, 최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현대 삶에서 우리는 왜 ‘진실’을 알기가 힘들까? 거의 모든 사람이 가진 휴대 전화에 포함된 카메라 기능은 전 국민의 사진작가 시대를 만들었고, 스마트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정보를 전달하고 확산시킨다. 어느 가게 사장의 막말이나 어떤 시민의 몰지각한 행동, 이웃 간의 다툼 등 수 없이 많은 사회 문제가 일어나는 와중에, 우리는 매우 빠르게 그런 소식을 듣고는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처음에 알려졌던 사실이 틀렸거나 혹은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이 밝혀지면서 상황이 다르게 돌아가곤 한다. 특히 일방적으로 나쁘다고 욕을 먹는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뒤늦게 나름의 이유와 그 배경이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상대방의 잘못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많이 겪다 보니 이제 한쪽의 입장만 들어서는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정상적인 사람들 간의 분쟁에 있어서 한 쪽이 일방적으로 잘못하는 경우는 크게 드물며,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잘못을 한 사람이 잘못을 시인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옳고 그르냐는 논란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양방의 과실이 있는데 서로가 상대방의 문제점만 지적하거나 자신이 불리한 진술은 감추고 상대방의 과실을 더욱 과장시킬 수 있는 진술만 한다. 정보력과 기술력이 발전할수록 이를 왜곡하는 능력도 함께 발전한다. 증거와 증인이 중심이 되는 현재의 법정에서 ‘진술’의 진실성, 즉 사건에 대한 객관적 사실의 증명은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은 일반인들뿐 아니라 고위 관료, 공무원, 기업인, 정치인, 심지어 언론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 모두가 자신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불리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사실을 왜곡한다.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오래된 영화가 있으니, 1950년에 제작된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다. 이 영화는 1951년 제 15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으며, ‘객관성’에 대한 강의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소재이다. 아주 예전부터 이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최근에 본 ‘제 5계급’을 보고 난 이후에 ‘진실’이라는 단어에 더욱 관심이 가게 되어 다시금 찾아보게 되었다.
이 영화에 소개되는 사건은 매우 단순하다. 한 부부가 숲 속에서 강도를 만나고 그로 인해 아내는 겁탈을 당하고 남편은 죽임을 당한다. 복잡하지도 않고 결과도 명백하지만, 그 과정에 대한 각자의 의견은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즉, 정확하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와중에 한 폐허에 있던 나무꾼과 승려, 그리고 비를 피해 그곳을 찾은 사내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전개가 된다. 나무꾼과 승려는 연신 ‘모르겠어, 아무래도 모르겠어’라고 하며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다. 그 모습에서 사내는 그들이 알고 있는 사건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그들이 겪은 기묘한 사건을 알려달라고 한다. 나무꾼은 자신이 나무를 하러 간 숲 속에서 누군가의 옷가지를 발견하여 그로부터 남편의 시체를 찾게 되고 관아에 보고하게 된다. 용의자로 잡힌 강도 ‘타조마루’는 자신이 그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 맞음을 인정을 하며,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남편을 속이고 여인을 겁탈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뒤 떠나려는 그의 앞에서 여인이 매달리며 자신의 치욕을 아는 두 남자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하며 두 사람의 결투를 요구하고 이로 인해 남편은 죽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돌아보니 여자는 사라졌고 죽인 남편의 검은 팔아 술을 마셨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내 마사코는 겁탈을 당한 뒤 남편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혐오스러운 감정을 발견하고 이성을 잃어 그를 그녀의 단도로 찔러 죽였다고 자백을 한다. 그리고 그 뒤에 여러 번 자살을 기도하였는데 실패하여 자신과 같은 힘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냐며 울먹인다. 죽은 남편은 영매사의 몸을 빌어 진술하는데, 타조마루가 마사코를 범한 것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미 더럽혀졌으니 자신의 아내로 사는 것이 어떻겠냐고 마사코를 설득했다고 했다. 이에 그녀는 전에는 본 적 없는 아름답고 애틋한 눈빛으로 타조마루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남편이 살아있는 한 떠날 수 없으니 죽여달라고 했다. 그러자 타조마루는 오히려 그녀를 내팽개치며 타케히로에게 마사코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고, 타케히로는 그로부터 오히려 타조마루를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마사코가 몰래 도망을 가고 난 뒤, 타조마루는 묶었던 줄을 풀어주고 갔다고 했다. 그리고 타케히로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아내의 단검으로 자결을 했다고 했으며, 누군가가 그 뒤 자신의 단검을 빼갔다고 했다.
관아에서 진술을 할 때 이들 이외의 다른 인물은 화면에 잡히지 않으며, 심지어 질문마저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홀로 독백을 하듯이 대답을 하며 그때의 상황을 진술한다. 이는 철저히 다른 세계와 격리시키면서 독자적인 입장인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앞서 세 명의 진술을 사내에게 얘기했던 나무꾼은 계속 모두들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중얼거리고, 이로부터 무엇인가를 눈치 챈 사내는 나무꾼에게 숨기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 하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나무꾼은 관아에서 했던, 단순히 사건 뒤의 현장만 발견했다는 진술과는 달리, 숨어서 그 현장을 관찰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타조마루는 마사코를 범한 뒤 아내가 되어 달라고 했지만 마사코는 자신의 남편인 타케히로의 포승줄을 단검으로 끊고는 두 사람 사이에서 쓰러지며 서럽게 울었다고 했다. 그녀의 의도를 눈치 챈 타조마루는 타케히로와 결투를 벌이려고 했지만 타케히로는 이런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걸 수는 없다며 오히려 마사코에게 불결하다며 자결하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이에 타조마루도 여자를 두고 돌아서려지만, 마사코는 타케히로에게 ‘왜 남편이면서 자신을 겁탈한 강도를 죽이지 않느냐고 따지고, 타조마루에게는 자신을 데려가 줄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결국 남편이랑 다를 바가 없다며 비난을 했다. 그리곤 ‘남자는 검으로 여자를 쟁취해야 한다’고 하자, 두 남자는 격렬한 결투를 벌이게 된다. 그리곤 결국 타조마루가 타케히로를 죽이게 되고, 그 사이에 마사코는 달아나고 말았다고 했다. 결국 나무꾼의 말대로라면 앞 선 세 명 모두가 거짓 증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는 나무꾼 역시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였고, 그는 나무꾼에게 그 여자의 단검은 어찌되었는지, 당신이 가져간 것이 아니냐고 따지고 묻게 되고, 나무꾼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게 된다.
이 영화는 그 누구도 확실한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점을 보여준다. 이 말은 각자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본 이야기를 할 뿐이라는 것으로, 객관성이 매우 결여되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건 현장을 관찰한 증인의 진술은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사항이 될 수 있는데, 그런 증언은 모두 어느 정도의 주관성을 내포하고 있고 이는 결국 모든 증언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객관적 경우는 없다고 여겨지게 된다. 통신 공학에서 신호에 랜덤 노이즈가 섞이면 그 신호도 결국 랜덤 노이즈와 마찬가지가 된다. 다만 노이즈의 크기가 신호에 비해서 매우 작다면 우리는 신호를 거의 완벽하게 추출할 수 있다. 그런데 신호의 크기가 작거나 노이즈가 크다면 우리는 원래의 신호를 구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 사회는 과연 노이즈를 구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모든 사람들이 하는 말에 노이즈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를 더욱 불신의 사회로 만들게 된다는 점이 너무 안타까우며, 결국 ‘진실’이란 높은 하늘의 구름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슬프다. 오래된 영화 ‘라쇼몽’은 꼭 한 번은 보고, ‘진실’ 혹은 ‘객관성’에 대해 고민을 해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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