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의 ‘그림 여행을 권함’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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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의 ‘그림 여행을 권함’ (2013)
우리는 바쁨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심지어 여유 시간이 주어지면 불안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유 시간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올라가는 몇 초 동안의 시간을 가만히 보내지 못해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천천히 갈 수 있는 여유를 가졌음에도 빠른 걸음을 재촉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을 지적하는 책들, 예를 들면 ‘느림의 미학’ 이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나도 이런 부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의 계룡산 등산에서 운동을 핑계 삼았기 때문에 오를 때는 다리 근육에 부담을 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걸었지만, 내려올 때는 누가 뒤에서 미는 듯하게 남들을 제쳐가며 빠르게 내려왔다. 하산 시에는 무릎에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천천히 걷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빠르게 내려왔는지 집에 돌아와서 후회가 되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걸었으면 주위의 나무, 꽃, 새들, 그리고 산 속에 숨어 있는 많은 경치들을 즐기면서 왔을 텐데, 정상에서 잠깐 아래를 내려다 보기만 한 점이 못내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나의 이런 마음이 동해서 짚은 책은 김한민 작가의 ‘그림 여행을 권함’이다. 일반적으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추억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과 달리 작가는 그림을 그릴 것을 권한다.
작가는 분주함이 여행 최대의 적이자,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그리고 바빠서 못 떠난다는 것보다 ‘바쁠수록 떠나야 한다’고 한다. 정신 없는 일상의 압도적인 속도를 다시 제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행할 시간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 없이 살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는 ‘어디 여행 좀 다녀와야겠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무심코 한 말 같지만 이는 자기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보호본능에서 비롯된 무언의 암시이며, 이를 무시하면 결국 우리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저자는 그림을 권할까? 그림은 명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동사이기도 한 말이다. 저자는 이러한 구조의 말들이 좋다고 한다. 꿈을 꿈, 삶을 삶, 그림을 그림. 이런 말들에는 결과와 과정을 동등하게 중요시하는 그런 뜻이 읽힌다고 하니 새로운 시선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림이라고 하면 종이에 남는 결과물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동, 더 자세히 말해 그리는 사람 속에 일어나는 시간의 변화라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사람은 다른 시간 속을 걷게 된다. 이 변화를 경험하는 과정이 종이에 그럴싸한 결과를 남기는 것보다 중요하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요 라고 말하면 이것은 ‘이 사람은 지금 다른 시간을 필요로 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 여행'은 대가들의 명화를 찾아 다니는 미술관 투어가 아니다. 작가 김한민에게 그림 여행이란 하잘것없어 보이는 낙서라도 직접 끼적이며 다니는 여행, 그림을 그리면서 긴장을 풀고 숨을 고르는 여행, 스케치북과 연필만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자신만의 속도로 발길 닿는 대로 낯선 곳을 어슬렁거리는 여행이다. 스리랑카와 덴마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남미 페루에서 자동차 정비학교 교사로 일하고, 독일에서 떠돌이 작가로 체류하는 등 다양한 문화적 체험 속에서도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작업만은 변함없이 지속해 온 작가 김한민은 지난 10여 년 동안 틈틈이 그려 온 그림들을 소개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여행을, 그리고 삶을 어떻게 다르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그가 공개한 스케치북에는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과 분주함, 공항에서의 흥분을 비롯해 프랑스, 영국,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의 도시에서부터 남아메리카의 페루, 에콰도르, 볼리비아의 여러 도시 풍광이 김한민 특유의 감수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공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그리며 그 간절한 마음을 상상한다. 파리에서는 사라져 가는 동네의 카페를 그리고, 캔터베리에서는 숙소 구석구석을 음미하며 시간을 기록한다. 브뤼셀에서는 잃었던 길을 또 잃고 헤매는 어수룩함을 자책하고, 이탈리아 배낭여행 중 히치하이크를 통해 만난 아주머니와 대화하며 서로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깨닫는다. 에콰도르의 고산 도시 키토에서는 세탁소 주인의 느긋함에 비행기를 놓칠까 발을 동동 구르고, 영국 도버로 향하는 페리에서 건달을 만난 뒤엔 화풀이 그림을 그려 마음을 달랜다. 남미의 고산 도시에서 만난 순수한 아이들과의 추억, 마누 정글에서 마주친 노인의 진심, 우아라스 산악 트래킹 동반자 나귀와 페루 사막 도시 치클라요에서 만난 강아지 치시토와의 추억 등이 빼곡히 담겨 있다. 또한 그림 여행 준비물에서부터 책상 없는 숙소에서 그림 그리는 방법까지 다양하게 수록된 팁 페이지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바쁜 일상에 쫓겨 잊혀진 감성과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고, 자신과 주변을 좀 더 깊이 바라보고, 그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은 다양한 방법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림 그리기는 그런 삶을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 중 하나이다. 이렇게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이 기록은 독자들에게 '그림 여행'을 권하지만, 그림 여행을 권하는 작가의 말투에는 강권함이 없다. 또한 전문가로서의 젠체함도 없고 그림을 잘 그려야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그의 그림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만의 그림 여행을 상상하게 된다. 저자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만화 ‘드래곤볼’의 한 장면을 인용해 ‘정신과 시간의 방’을 다녀왔다라고 표현하며, 이 경험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다. 평소와 다른 속도로 진행되는 여행의 시간만큼 그림 그리기에 어울리는 시간도 없다고. 그림은 여행의 재미를 더해주고, 여행의 기억들을 더 소중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주어, 두고두고 펼쳐보게 할 것이며, 그렇게 펼칠 때마다 미소를 자아내게 해줄 것이다. 저자가 권하는 ‘그림 여행’이 아니더라도, 가끔씩 각자의 여유를 찾아서 주위를 살필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은 긴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을 꼭 생각하며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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