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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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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윤상
댓글 0건 조회 4,589회 작성일 13-09-09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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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평전


 

정론직필(正論直筆) – 정당하고 이치에 맞는 의견이나 주장으로 무엇에 구애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적는다는 의미의 표현이다.  이 말은 다른 분야에서도 적용되는 어구이긴 하지만, 특히 언론계에서는 그 존립의 근원을 얘기하는 것이기에 특히나 더 중요하다. 하지만, 비단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에서도 이 언론이 지녀야 할 근본 자세가 쉽게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제시대 때는 일제에 의한 언론의 왜곡이, 해방 후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으로 이어지는 독재 및 군부 정권 때문에 왜곡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대를 관통하여 살아간 사람들(특히 언론인들) 중에 유독 한 사람만이 앞서 언급한 어구의 참 뜻을 지켜온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청암 송건호 선생이다. 언론계에서의 송건호 선생의 중요성은 10권이 넘는 선생에 대한 전집의 양만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송건호 선생의 일대기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전집을 읽기에는 현실적인 여건상 힘들기에 그에 대한 평전을 찾던 중 선생과 동시대를 살아온 언론인인 김삼웅 선생이 쓴 ‘송건호 평전’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살아온 송건호 선생의 일대기를 보노라면 저자의 찬양(?) 일색의 표현이 과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1925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난 청암 선생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삶을 살았다. 평전에서는 청암의 삶을 크게 여섯 시기로 나누어 놓았다. 해방 전까지의 첫 번째 시기는 청암의 유년기로써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일제치하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던 청암과 그 시대상이 잘 나타나 있다. 유년기의 청암은 대부분의 언론인들이 그렇듯 많은 책을 읽었고 그 중에서 민족주의 색채를 띈 책들을 깊이 있게 읽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해방 후 대한통신사에서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청암의 두 번째 시기는 이승만 정권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해방 직후의 이승만 정권은 취임한지 한 달도 안 되어 언론정책 7개항을 발표하여 언론통제 입장을 보였다. (7개의 조항은 대한민국 국책을 위반하는 기사, 정부를 모략하는 기사, 공산당을 인정 내지 비호하는 기사, 허위 사실을 날조 선동하는 기사, 국위를 손상하는 기사, 민심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기사, 그리고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는 기사 이다.) 이러한 언론통제 입장은 당연히 언론계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지만, 곧이어 터진 6.25 전쟁으로 인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한민국 수호 및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청암 선생은 평범한 외신기자 신분이어서 그런지 뚜렷한 활동이 있진 않았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발탁된 이후 청암의 본격적인 정론직필이 시작되었다. 4월 혁명으로 수립된 장면 정권이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무너진 이후 ‘민정이양’의 혁명공약을 헌신짝 버리듯 하면서 군정 연장을 발표하자 청암은 구속될 각오를 하고 군정 연장을 반대하는 사설을 썼다. 그러나 이 사설은 일주일 동안 데스크에 묶여 있다가 결국 나가지 못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아무리 위험을 무릅쓰고 정론에 따른 기사나 사설을 써도 사주가 틀어버리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듯 하다.) 이 당시에는 청암이 경향신문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간첩사건을 빌미로 사장 이준구를 구속하고 사장 석방을 조건으로 신문을 공매처분하는 방식으로 빼앗았다. 이렇게 사주가 교체되자 청암은 편집장 직을 버리고 신문사를 떠났다. 마치 신채호 선생이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항일논설을 쓰다가 이 신문이 친일파의 손으로 넘어가자 계속 논설 책임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망명길에 오른 것처럼 말이다. 이승만 정부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박정희 정부에서의 언론사 사주들은 대부분 친정부 성향의 인물로 채워지면서 더 이상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이 이 시기에 현재와 같이 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청암이 다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언론계에 복귀하게 되었고 1971년 4월 15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에도 참석하여 더 이상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신문사에 상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당시 200여명의 기자들 중 30여명만이 참석한 선언이었지만, 논설위원으로써 앞장 서 참석한 것으로 보아 그의 투철한 정론직필 정신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유신 이후 다시금 언론탄압을 자행하였고 청암은 다시 한번 신문사를 그만두게 된다. 그 이후 한양대학교에 출강을 다녔으나 당국의 압력으로 이마저도 얼마 가지 못하였다. 언론계로의 직접적인 진출이 힘들게 되자 청암은 한국현대사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게 되고 이는 한국현대사 연구의 초석이 된다. 그리고 1987년 국민들의 세금으로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여 대표이사를 맡아 진보 언론의 대부로 추앙받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 부터는 신군부에 의한 고문후유증으로 인해 건강이 서서히 좋지 않게 됨에 따라 긴 투병생활 끝에 2001년 영면에 들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평전은 후세의, 다루어질 인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작가가 써야 다루어질 인물의 일대기에 대해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김상웅 선생이 쓴 이 평전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더불어 보다 송건호 선생의 입장을 배려하여 쓴 글이어서 그의 업적에 대한 기술은 자세한 반면, 그 이면의 어두운 삶에 대한 기술은 그다지 자세하지 않았다.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찬양(?) 일색의 표현이 약간 거슬렸다. 더불어, 저자가 서술하는 문단과 실제 청암 선생이 얘기했던 내용들이 계속 교차되어 나옴에 따라 읽는 내내 이 둘을 계속적으로 구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끝으로, 앞서 언급했듯이 청암 선생의 어두운 삶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비단 청암 선생만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이 당시 언론 수호를 위해 애썼던 분들은 당국의 탄압으로 인해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고문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닐 수 없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힘들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당사자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때문에 저자도 청암 선생도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표현되어 있었다. 다만, 단재 신채호 선생의 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는데, 단재 선생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본인 뿐만 아니라 식솔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각오해야 한다고 다짐하셨다. 청암 선생은 단재 선생의 강한 의지를 따랐기에 현재에 이르러 많은 언론인들로부터 추앙을 받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단재 선생과 청암 선생이 삶을 보냈던 시대와 전혀 다른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부분들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회에서 기꺼이 보상해줄 필요가 있다. 이들이 많아질수록 더욱 건전한 대한민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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