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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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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윤상
댓글 0건 조회 5,949회 작성일 13-07-12 21:37

본문


사람은 갈등을
일상적 실존의 고유한 부분으로 받아들여 왔는데 그 이유는 경쟁, 질투,
탐욕, 취득심, 공격 등을 삶의 자연스런 방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러한 생활방식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액면 그대로의 사회구조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틀 속에 사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들 스스로가
엄청나게 존대 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점검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느끼는 방식 그리고 나날의 삶 속에서 행동하는 방식을 점검해 보면, 우리가
사회의 틀에 순응하는 한 삶은 전장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로소 사회의 심리적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사회의 산물들이 매우 많다. 사회가 우리 안에 만들어 놓은 것,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만들어
놓은 것은 탐욕, 질투, 분노, 증오, 선망, 불안 등으로, 우리에게는 이것들이 매우 풍부하다. 세계의 여러 종교들은 가난을
설교해 왔다. 승려는 승복을 입고, 이름을 바꾸고, 머리를 깎고, 암자에 들어가 가난과 순결을 맹세한다. 동양에서는 허리에 걸치는 간단한 옷 한 벌, 승복 한 벌에, 하루 한 끼를 먹는데, 우리는 모두 그런 가난을 존경한다. 그러나 그렇게 가난의 옷을 입은 사람들도 내적,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사회의 산물들을 많이 갖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지위와 명망, 위세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종단에서 한 자리 하려고 하는 승려들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런 지위 또는 저런 등급에 속해 있고, 이런 종교나 저런 종교에 속해 있으며, 여전히 한 문화, 한 전통의 분열 속에 살고 있다. 그것은 가난이 아니다. 가난은, 옷이 좀더 많고 먹을 것이 좀더 많더라도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과시하려는 충동이 있다. 마음이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때 가난은 놀랄 만큼 아름다운 것이 된다. 우리는
내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아무런 요구나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무 것도, 이
내적 가난만이 삶의 진실을 볼 수 있으며 거기엔 아무 갈등도 없다. 그러한 삶은 어떤 교회에서도, 어떤 사원에서도 발견될 수 없는 축복이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을 사회의 심리적 구조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을까? 저자는 단순히 갈등의 가지들을 잘라내는 것이 아닌
완전한 내적 고요 속에 살 수 있는지의 여부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식물적으로 되거나 정체적으로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반대로 역동적이고 생동적이며 힘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어떤
문제를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대단히 정열적이고 지속적인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것은
육체적, 지적 에너지뿐만 아니라 어떤 동기, 심리적 자극
또는 약물에 의존하지 않는 에너지를 말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자극에 의존한다면 그 자극은 곧 마음을
둔하고 무감각하게 만든다. 어떤 약물의 힘으로 일시적이나마 사물을 명징하게 보는 힘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는 곧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그래서 그 약물에 더욱더 의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자극은 필연적으로 의존을 가져오며 그 의존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분명히 보지 못하게 하여 생동적
에너지를 가로막는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모두 심리적으로 무엇인가에 의존하고 있다. 왜 우리는 의존하는가? 왜 의존하고 싶은 충동이 있는가? 저자의 경우 그는 청중들에게 의존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들은 저자에게 더욱 더 활력을 준다고 한다. 만일 독자들이 동의하면 활력은 매우 미미하고
텅 빈 것이 된다. 사람들한테 강연하는 것이 저자에게 아주 자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청중을 필요로
한다는 걸 잘 안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왜 나는 의존하는가?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야 얻은 대답은 나 자신 안에 항상 넘치고 풍부하고 활력 있고 움직이며 살아 있는 원천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의존한다. 나는
그 원인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 원인을 발견했다고 해서 내가 의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 원인의 발견은 다만 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히 내 마음을 의존성으로부터 해방시키지 않는다. 어떤 관념을 단순히 지적으로 수락하는 것이나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한 감정적 묵인은, 자극을 주게 될 어떤 것에서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가 없다. 마음을
의존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자극과 의존의 전체 구조를 아는 것이며 그 의존이 어떻게 마음을 어리석고, 둔하고, 활발하지 못하게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 전부를 보는 것만이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그래서 나는 총체적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따져보아야만 한다. 내가 어떤 특별한 관점이나 소중히 여기는 독특한 체험으로 삶을 볼 때, 또는
내가 모은 어떤 독특한 지식으로 삶을 볼 때 나는 총체적으로 볼 수 없게 된다. 나는 내 의존의 원인을
지적으로, 말로, 분석을 통해서 발견했지만, 생각이 탐색한 것은 모두 단편적이기 때문에 생각이 끼여들지 않을 때에만 나는 어떤 것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다.

모방하고 권위를 받아들이고 사제한테 의존하고 의식 이나 도그마에 의존하면 에너지의 낭비가 없으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떤 이데올로기를 따르고 수락하는 것은 조각난 행동이고 따라서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있어야 하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 분열이 있는 한 반드시 갈등은 있게 마련이고 에너지 분산을 의미한다. 스스로 '어떻게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또 하나의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갈등은 증가하게 된다. 반면,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보듯 그것을 사실로서 똑바로 보기만 한다면 아무런 갈등도 없는 삶의 진실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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