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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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 경쟁사회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아서
2013년의 대한민국은 어느 정도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갖은 지 어언 60여년이 흐르고 새마을 운동 등 이른바 ‘열심히 살기 정신’으로 민족이 똘똘 뭉쳐 이뤄낸 거대한 성과이다. 우리는 발전하기 위해 노동하였고, 그러한 시대 속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배우고 자란 현재의 20, 30대들 또한 그렇게 살기를 요구받고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듣고 자랄 법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이 말은 나도 들었고 지금 자라나고 있는 어린 아이들도 듣고 있다. 자연스레 치열한 경쟁사회로 몰려가고 있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할 때에는 그것의 최종목표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중간에 길을 잃고 산으로 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 필연적으로 들어가 있는 노동!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일을 한다. 그들은 돈을 벌기위해, 행복하기 위해 일을 한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하여 질수록 그들의 본래 목적은 잊혀 가며 노동 그 자체에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책에서는 향락 노동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설명하고 있다. 노동을 하며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며 강박 증세를 보이고,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해야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는 참 자유와 행복이 될 수 없다. 모든 관심과 신경이 일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모든 가능성을 가능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박적으로 활용하지 않을 때 자유롭다. 무위의 자유, 중단과 여유, 놓아주기의 자유를 배워야 한다. 능동성 옆에 수동성을 가져올 만반의 준비를 하고 노동을 할 때, 행복이 오고 덤으로 효율이라는 선물이 온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쾌락에 대해 강박적으로 반응한다. 오래 전부터 예의, 매너, 도덕 등과 같은 덕목들이 견고히 체계를 갖추며 일정한 틀을 만들어 왔다. 많이 먹는 자에게 적게 먹고 운동할 것을 권장하며, 문란한 성관계를 갖는 사람에게 정숙할 것, 많이 자는 자에게 깨어 일어나 일할 것을 권장한다. 이것을 웰니스 향락이라 하는데 건강하고 깨끗한 것, 선하고 위험하지 않은 것, 성과 사회의 정언명령을 절대 어기지 않는 것이 향락의 내용이 된다. 웰니스 향락으로 참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선을 극단으로 가져가는 것에 있다. 스스로 행동할 때 강박관념을 갖고 자책하는 것이 반복될 때, 그의 노동과 모든 행동은 반드시 우울해 질 수 밖에 없다. 일례로 성욕에 대한 내용을 보자. 인간은 섹스를 한다. 섹스는 스킨십을 자연스레 갖고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21세기가 되면서 점차 사회가 인터넷화 되었고 1000분의 1초안에 포르노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위행위를 통해 스스로 성욕을 해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더 이상 어떠한 성적인 단어도 자극적이지 않게 되었다. 자연스레 현대 사회는 탈섹스화 되고 섹스 없는 사회에서 인간들은 결속되지 않는다. 공동체 안에서의 삶이 초래하는 공격성을, 탐욕과 질투와 시기심을 성행위보다 평화적이면서 열정적으로 분출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많아지게 되어 산산이 흩어진 사회가 초래될지도 모른다. 우울할 수밖에 없다.
위의 이야기 모두 경계를 모르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사회의 흐름에 맞추어 가면서 다른 누군가 보다 더 앞으로 빨리 나가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선을 자신에게 더 엄격하게 갖고 온다. 그들의 삶은 사회적으로 더 빨리 성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그들의 통증도 함께 성장한다. 완벽한 삶에 대한 욕구로 인해 그들의 심신이 망가져 가는 것도 모른다. 필연적인 우울함을 동반하기에 최적화된 경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통증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아야한다. 그것은 노동의 반대, 무위로 비롯될 수 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정말 멀리 보는 사람은 1보 후퇴할 줄 아는 사람이다. 노동이 우울하지 않은 그들의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 경쟁사회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아서
2013년의 대한민국은 어느 정도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갖은 지 어언 60여년이 흐르고 새마을 운동 등 이른바 ‘열심히 살기 정신’으로 민족이 똘똘 뭉쳐 이뤄낸 거대한 성과이다. 우리는 발전하기 위해 노동하였고, 그러한 시대 속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배우고 자란 현재의 20, 30대들 또한 그렇게 살기를 요구받고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듣고 자랄 법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이 말은 나도 들었고 지금 자라나고 있는 어린 아이들도 듣고 있다. 자연스레 치열한 경쟁사회로 몰려가고 있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할 때에는 그것의 최종목표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중간에 길을 잃고 산으로 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 필연적으로 들어가 있는 노동!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일을 한다. 그들은 돈을 벌기위해, 행복하기 위해 일을 한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하여 질수록 그들의 본래 목적은 잊혀 가며 노동 그 자체에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책에서는 향락 노동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설명하고 있다. 노동을 하며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며 강박 증세를 보이고,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해야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는 참 자유와 행복이 될 수 없다. 모든 관심과 신경이 일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모든 가능성을 가능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박적으로 활용하지 않을 때 자유롭다. 무위의 자유, 중단과 여유, 놓아주기의 자유를 배워야 한다. 능동성 옆에 수동성을 가져올 만반의 준비를 하고 노동을 할 때, 행복이 오고 덤으로 효율이라는 선물이 온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쾌락에 대해 강박적으로 반응한다. 오래 전부터 예의, 매너, 도덕 등과 같은 덕목들이 견고히 체계를 갖추며 일정한 틀을 만들어 왔다. 많이 먹는 자에게 적게 먹고 운동할 것을 권장하며, 문란한 성관계를 갖는 사람에게 정숙할 것, 많이 자는 자에게 깨어 일어나 일할 것을 권장한다. 이것을 웰니스 향락이라 하는데 건강하고 깨끗한 것, 선하고 위험하지 않은 것, 성과 사회의 정언명령을 절대 어기지 않는 것이 향락의 내용이 된다. 웰니스 향락으로 참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선을 극단으로 가져가는 것에 있다. 스스로 행동할 때 강박관념을 갖고 자책하는 것이 반복될 때, 그의 노동과 모든 행동은 반드시 우울해 질 수 밖에 없다. 일례로 성욕에 대한 내용을 보자. 인간은 섹스를 한다. 섹스는 스킨십을 자연스레 갖고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21세기가 되면서 점차 사회가 인터넷화 되었고 1000분의 1초안에 포르노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위행위를 통해 스스로 성욕을 해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더 이상 어떠한 성적인 단어도 자극적이지 않게 되었다. 자연스레 현대 사회는 탈섹스화 되고 섹스 없는 사회에서 인간들은 결속되지 않는다. 공동체 안에서의 삶이 초래하는 공격성을, 탐욕과 질투와 시기심을 성행위보다 평화적이면서 열정적으로 분출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많아지게 되어 산산이 흩어진 사회가 초래될지도 모른다. 우울할 수밖에 없다.
위의 이야기 모두 경계를 모르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사회의 흐름에 맞추어 가면서 다른 누군가 보다 더 앞으로 빨리 나가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선을 자신에게 더 엄격하게 갖고 온다. 그들의 삶은 사회적으로 더 빨리 성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그들의 통증도 함께 성장한다. 완벽한 삶에 대한 욕구로 인해 그들의 심신이 망가져 가는 것도 모른다. 필연적인 우울함을 동반하기에 최적화된 경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통증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아야한다. 그것은 노동의 반대, 무위로 비롯될 수 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정말 멀리 보는 사람은 1보 후퇴할 줄 아는 사람이다. 노동이 우울하지 않은 그들의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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