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눈 아이와 그 못돼 먹은 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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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눈 아이와 그 못돼 먹은 계집
- 백설 공주는 공주가 아니다?! (2008), 다락방의 미친 여자 (1984)
Little white snow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백설 공주의 영어 제목이며, 그림 형제가 쓴 원본에서는 Sneewittchen이라고 되어 있다. 재미있게도 영어 제목이든 독일어 제목에서든 공주를 뜻하는 말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백설공주는 공주가 된 것일까? 사실 이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은 그 아이가 설상 공주였다고 한들 원본에서는 왜 공주라고 불리지 않았는가 이다. 심지어 원본에서 공주를 뜻하는 말이 한 번도 언급이 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 모두 놀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원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백설공주를 ‘공주’라고 여기고, 깜찍하거나 귀엽고 연약한 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이야기의 주인공의 성격을 엉뚱하게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 전체의 틀을 흔들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양호 씨는 약 168편이 넘는 기존의 많은 백설 공주는 모두 번역이 잘못 되었으며 너무 많은 편집이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또 하나의, 진짜 백설 공주 이야기를 해준다. ‘백설 공주는 공주가 아니다?!’의 이름으로 된 이 책은 ‘백설 공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림 형제의 이야기를 영어 번역본과 독일 원본 그리고 저자의 한글 번역과 함께 자신이 그렇게 번역을 한 배경과 이야기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다.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보면 무릎을 탁 하고 칠 정도로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독일어로 된 원본의 의도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백설 공주’가 아니라 ‘새하얀 눈 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 아이를 괴롭히는 역할을 하는 ‘왕비’ 역시 원본에서는 ‘그 못돼 먹은 계집’ 이라는 표현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서적들은 ‘왕비’라는 표현으로 통일시켜버렸으며, ‘피처럼 붉은 아이’는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아이’로 잘못 번역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이어령 님의 ‘기호론적인 문학’에 대해 고려해 볼 때 심각하게 잘못 된 번역이며 원본의 의도를 왜곡하고 독자들의 다양한 생각을 위한 기회를 박탈시켜버리는 것이다. 특히 원작의 저자들인 그림 형제들은 독일이 자랑하는 언어학자이자 사전편찬자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원본에서의 표현들은 매우 의도적이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번역본들의 이러한 오류는 이 이야기 하나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그림 형제의 다른 이야기들,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 등에서도 그러한 흠집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이러한 오류는 본래 성인들을 위해, 성인들이 구연한 이야기인 전래 동화(Märchen)를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인 ‘동화’라고 여기면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원래 편집되어 잘려진 ‘멧돼지의 간과 허파를 백설 공주의 간과 허파로 여기고, 그것을 요리해 먹는 나쁜 여왕이 나오는 대목’이나 ‘불에 달구어진 쇠신발을 신고 춤을 추는 대목’ 등이 포함되면서 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로 바뀌게 되었다. 마치 ‘어린 왕자’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것처럼 ‘백설 공주’ 역시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에게도 충분히 재미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 책에서 알려주는 해설을 함께 읽어보면 그림 형제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새하얀 눈 아이’ 이야기를 썼는지 알 수 있다. ‘눈처럼 새하얗고 (하늘), 피처럼 붉고 (사람), 창틀의 나무처럼 검은 (땅)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하는 마음에서 딸아이가 태어나자 여왕은 생기가 다 빠져 말라죽었다는 점(희생), ‘7’살이 된 새하얀 눈 아이가 계모 여왕에게 쫓겨나서, ‘7’개의 산을 건너, ‘7’ 난쟁이가 사는 곳에 도착했다는 점 등 생각해보면 재미난 부분들이 매우 많다는 점에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게끔 만들어준다.
‘새하얀 눈 아이’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점은 ‘여왕’은 나오지만 ‘왕’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새하얀 눈 아이는 왕과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여왕의 바람’에서 태어났다는 부분에서 철저히 왕은 배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새하얀 눈 아이’와 ‘못돼 먹은 계집 (계모, 여왕)’의 두 여성 간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점은 앞선 내용들과 달리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만한 여지를 준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분석은 페미니스트적인 측면에서 서양 문학을 분석한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책에서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새하얀 눈 아이 이야기의 첫 번째 여왕은 ‘창문’을 통해 외부로 눈길을 주고 있는 반면 새 여왕은 ‘거울’을 통해 나르시시즘이라 불리는 내면으로의 탐색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거울에 비친 어머니와 딸, 여자와 여자, 자아와 자아 사이의 갈등에 매우 강렬하게 집중하고 있으며, 거울의 목소리는 겉으로는 부재되어 보이는 ‘왕’의 목소리, 즉 여왕의 자아 평가를 지배하고 심판하는 가부장적인 목소리로 해석한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여왕은 거의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교활하고 자아도취적인 반면, 새하얀 눈 아이는 절대적인 순결성, 얼어붙은 순수성, 사랑스런 무(無)의 속성을 가진 여성으로 나타난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서구 사회에서 여성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생식력이 없다는 점에서 창조성, 즉 예술과 같은 영역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펜을 비유적인 의미 이상으로 남성의 음경으로서 여기었기 때문에 모든 여성들은 순종과 겸양, 헌신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남성 작가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여성은 항상 (집안의) 천사였다는 점에서 여자는 남편의 ‘의미 있는 행위의 삶’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피와 땀으로부터 그를 지켜 주는 신성한 안식처가 되어야 하며, 또한 ‘명상적인 순수함’을 가지고 살아 있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악마인 양 피해야 했으며, 남성 작가들은 자율성을 지닌 여성을 나쁜 이름(마녀, 음란한 여자, 악마, 괴물 등)으로 부름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완화시키고자 그들의 권력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거울의 목소리가 여성들을 서로 반목하게 만들고 여왕의 필사적인 집착이 새하얀 눈 아이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게 된다. 특히 난쟁이들은 새하얀 눈 아이를 여왕으로부터 구해주는 일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들과의 생활을 통해 청소나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은 순종적인 여성성을 교육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점은 이와 같은 ‘착한 천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부분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서와 같이 같은 여성이면서 다른 자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기의 다른 내면을 바라보고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애를 쓰는 과정에서 여성은 남성의 창조적 권력(author-ity) 앞에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백설 공주는 단순히 권선징악의 동화가 아니라 나름의 특별한 의도 아래에서 쓰여졌다는 점은 이 두 책을 읽으면서 참 새롭게 와 닿았다. 특히 페미니스트적인 관점에서의 해석은 너무 독특하게 느껴지면서도 재미있게 받아들여졌다. 단순하다고 생각되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보며 다양한 각도로 생각해보는 것도 작품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넓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백설 공주는 공주가 아니다?! (2008), 다락방의 미친 여자 (1984)
Little white snow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백설 공주의 영어 제목이며, 그림 형제가 쓴 원본에서는 Sneewittchen이라고 되어 있다. 재미있게도 영어 제목이든 독일어 제목에서든 공주를 뜻하는 말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백설공주는 공주가 된 것일까? 사실 이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은 그 아이가 설상 공주였다고 한들 원본에서는 왜 공주라고 불리지 않았는가 이다. 심지어 원본에서 공주를 뜻하는 말이 한 번도 언급이 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 모두 놀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원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백설공주를 ‘공주’라고 여기고, 깜찍하거나 귀엽고 연약한 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이야기의 주인공의 성격을 엉뚱하게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 전체의 틀을 흔들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양호 씨는 약 168편이 넘는 기존의 많은 백설 공주는 모두 번역이 잘못 되었으며 너무 많은 편집이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또 하나의, 진짜 백설 공주 이야기를 해준다. ‘백설 공주는 공주가 아니다?!’의 이름으로 된 이 책은 ‘백설 공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림 형제의 이야기를 영어 번역본과 독일 원본 그리고 저자의 한글 번역과 함께 자신이 그렇게 번역을 한 배경과 이야기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다.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보면 무릎을 탁 하고 칠 정도로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독일어로 된 원본의 의도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백설 공주’가 아니라 ‘새하얀 눈 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 아이를 괴롭히는 역할을 하는 ‘왕비’ 역시 원본에서는 ‘그 못돼 먹은 계집’ 이라는 표현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서적들은 ‘왕비’라는 표현으로 통일시켜버렸으며, ‘피처럼 붉은 아이’는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아이’로 잘못 번역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이어령 님의 ‘기호론적인 문학’에 대해 고려해 볼 때 심각하게 잘못 된 번역이며 원본의 의도를 왜곡하고 독자들의 다양한 생각을 위한 기회를 박탈시켜버리는 것이다. 특히 원작의 저자들인 그림 형제들은 독일이 자랑하는 언어학자이자 사전편찬자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원본에서의 표현들은 매우 의도적이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번역본들의 이러한 오류는 이 이야기 하나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그림 형제의 다른 이야기들,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 등에서도 그러한 흠집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이러한 오류는 본래 성인들을 위해, 성인들이 구연한 이야기인 전래 동화(Märchen)를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인 ‘동화’라고 여기면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원래 편집되어 잘려진 ‘멧돼지의 간과 허파를 백설 공주의 간과 허파로 여기고, 그것을 요리해 먹는 나쁜 여왕이 나오는 대목’이나 ‘불에 달구어진 쇠신발을 신고 춤을 추는 대목’ 등이 포함되면서 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로 바뀌게 되었다. 마치 ‘어린 왕자’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것처럼 ‘백설 공주’ 역시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에게도 충분히 재미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 책에서 알려주는 해설을 함께 읽어보면 그림 형제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새하얀 눈 아이’ 이야기를 썼는지 알 수 있다. ‘눈처럼 새하얗고 (하늘), 피처럼 붉고 (사람), 창틀의 나무처럼 검은 (땅)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하는 마음에서 딸아이가 태어나자 여왕은 생기가 다 빠져 말라죽었다는 점(희생), ‘7’살이 된 새하얀 눈 아이가 계모 여왕에게 쫓겨나서, ‘7’개의 산을 건너, ‘7’ 난쟁이가 사는 곳에 도착했다는 점 등 생각해보면 재미난 부분들이 매우 많다는 점에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게끔 만들어준다.
‘새하얀 눈 아이’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점은 ‘여왕’은 나오지만 ‘왕’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새하얀 눈 아이는 왕과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여왕의 바람’에서 태어났다는 부분에서 철저히 왕은 배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새하얀 눈 아이’와 ‘못돼 먹은 계집 (계모, 여왕)’의 두 여성 간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점은 앞선 내용들과 달리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만한 여지를 준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분석은 페미니스트적인 측면에서 서양 문학을 분석한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책에서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새하얀 눈 아이 이야기의 첫 번째 여왕은 ‘창문’을 통해 외부로 눈길을 주고 있는 반면 새 여왕은 ‘거울’을 통해 나르시시즘이라 불리는 내면으로의 탐색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거울에 비친 어머니와 딸, 여자와 여자, 자아와 자아 사이의 갈등에 매우 강렬하게 집중하고 있으며, 거울의 목소리는 겉으로는 부재되어 보이는 ‘왕’의 목소리, 즉 여왕의 자아 평가를 지배하고 심판하는 가부장적인 목소리로 해석한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여왕은 거의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교활하고 자아도취적인 반면, 새하얀 눈 아이는 절대적인 순결성, 얼어붙은 순수성, 사랑스런 무(無)의 속성을 가진 여성으로 나타난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서구 사회에서 여성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생식력이 없다는 점에서 창조성, 즉 예술과 같은 영역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펜을 비유적인 의미 이상으로 남성의 음경으로서 여기었기 때문에 모든 여성들은 순종과 겸양, 헌신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남성 작가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여성은 항상 (집안의) 천사였다는 점에서 여자는 남편의 ‘의미 있는 행위의 삶’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피와 땀으로부터 그를 지켜 주는 신성한 안식처가 되어야 하며, 또한 ‘명상적인 순수함’을 가지고 살아 있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악마인 양 피해야 했으며, 남성 작가들은 자율성을 지닌 여성을 나쁜 이름(마녀, 음란한 여자, 악마, 괴물 등)으로 부름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완화시키고자 그들의 권력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거울의 목소리가 여성들을 서로 반목하게 만들고 여왕의 필사적인 집착이 새하얀 눈 아이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게 된다. 특히 난쟁이들은 새하얀 눈 아이를 여왕으로부터 구해주는 일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들과의 생활을 통해 청소나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은 순종적인 여성성을 교육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점은 이와 같은 ‘착한 천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부분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서와 같이 같은 여성이면서 다른 자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기의 다른 내면을 바라보고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애를 쓰는 과정에서 여성은 남성의 창조적 권력(author-ity) 앞에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백설 공주는 단순히 권선징악의 동화가 아니라 나름의 특별한 의도 아래에서 쓰여졌다는 점은 이 두 책을 읽으면서 참 새롭게 와 닿았다. 특히 페미니스트적인 관점에서의 해석은 너무 독특하게 느껴지면서도 재미있게 받아들여졌다. 단순하다고 생각되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보며 다양한 각도로 생각해보는 것도 작품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넓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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