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어린이의 시각으로 본 역사적 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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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어린이의 시각으로 본 역사적 참상
“위안부는 강제적이지 않았으며 그들은 ‘매춘부’였다”
“그들에 대한 법정 보상은 끝났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명백한 일본땅이다”


2006년 2월, 입대 전 폴란드의 황량한 한 시골마을이 내겐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밤새 야간열차를 타고 피곤한 천근만근의 몸을 이끌고 내 몸 덩치만큼이나 크고 둔탁한 여행용 캐리어를 기차에서 내리며 차가운 겨울바람을 느꼈던 폴란드의 어느 한 시골마을의 이름은 오슈비엥침(Oswiecim), 우리에게는 독일발음인 ‘아우슈비츠’로 더 유명하게 알려져 있는 비극의 마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못된 짓에 치를 떨곤 한다. 하지만 유대인이 독일나치에 의해 당한 학살에 대해서는 끔찍했다고는 들어왔지만 피부로 느끼기 힘들기 마련이다. 적어도 아우슈비츠를 가는 바로 전 정착지인 폴란드의 Krakow역에 내릴 때까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Krakow역에 내린 시간은 2006년 2월 15일 아침 7시 20분쯤이었다. 1시간 40분 연착하여 도착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행 열차를 오전 9시 5분에 타야 했다. 아우슈비츠역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반경.. 역에서 걸어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박물관으로 갔다. 수용소는 단체관광객들로 붐볐다. 11시 20여분쯤에 시작하여 1시 40분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일부만 돌아보았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힘들었다. 우리가 본 제 1수용소말고 제 2 수용소는 이보다 몇 배나 크다고 한다. 두 번째 수용소인 브졔진카까지 돌아보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첫 번째 수용소에서만 독일나치의 잔혹함을 볼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 누구나 익히 아는 ‘안네의 일기’의 안네의 가족이 몰살된 곳이며,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인 독일장교 쉰들러가 한 사람의 유대인이라도 더 살리려고 노력했던 바로 그 수용소가 위치해 있는 곳은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라는 영화의 배경이기도 하다.
탐험가를 꿈꾸던 아홉 살 브루노는 높은 직위의 독일장교인 아버지의 근무지가 바뀌면서 수용소 주변의 공관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탐험을 하고 싶지만 부모님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관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럴수록 바깥세상에 궁금함을 느끼던 브루노는 결국 철조망 사이로 공관을 탈출하여 수용소의 철조망까지 가게 된다.

그곳에서 또래 친구인 쉬뮈엘을 만나게 된다. 그곳의 사람들은 브루노눈에는 파란색 줄무늬 파자마만 입고 있는 이상한 사람들로 보였고 항상 굶주리고 피곤한 상태로 보였다. 결국 쉬뮈엘과 놀기도 하고 수용소 내에서 사라졌다는 (사실 가스실에서 몰살당했지만) 쉬뮈엘의 아버지를 찾으러 철조망 너머로 들어가게 된다. 쉬뮈엘이 준비해온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채 독일군의 명령에 따라 다른 줄무늬 옷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샤워실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브루노는 돌아오지 못한다.
이 영화는 매우 잔잔하게 브루노의 시각으로 아우슈비츠의 처참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같은 제목의 책으로도 나와있는데 나는 영화로 먼저 접하였다. 그리고 직접 내가 밟았던 땅, 그리고 가스실 바닥, 콘크리트 벽의 손톱자국들이 바로 150만명이 처참하게 몰살된 그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었다. 그렇게 호기심 많은 독일소년도 그렇게 스러져간 것이다. 두 아이들의 우정을 조명하여 유대인 학살의 잔혹한 실태를 더 가슴에 진한 여운이 남도록 제작한 영화인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2006년 2월15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리고 2008년 여름에 방문했던 뮌헨의 다하우 수용소를 내내 떠올리며 가슴에 울렁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이 먹먹함이라고 표현해야 할는지 또는 그 시대가 다 지나고 평화로운 2000년대의 한국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에는 그 유명하고 악명 높은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수용소에 입장하다 보면 좌우로 전기철조망이 두 겹으로 살벌하게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세상과 격리시키고 있다. 수용소 내부에서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느꼈던 살벌함과 잔인함을 느낄 수 있었고 당시 서대문 형무소의 통곡의 미루나무가 아우슈비츠의 시체소각로굴뚝과 오버랩 되어 보였다. 어느 수용소 건물 입구에 쓰여 있던 문구를 잊지 못해 당시 일기에 적어왔는데 이는 바로,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그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였다. 이 문구를 통해 독일인들이 왜 그렇게 유대인 기념 박물관, 유적지들을 곳곳에 만드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브루노가 쉬뮈엘과 줄무늬파자마를 입고 고통스럽게 죽어간 그 가스실, 한 번 들어가면 가스실의 연기로밖에 나갈 수 없는 그곳에 있자니 인간의 잔혹함이 끝이 없다는 것을 당시 뼈저리게 느꼈다.

그들은 내가 수십 년 뒤에 그 고통의 길을, 수백만의 ‘존엄한 생명’들이 하나의 도구 같은 인생을 살며 가축같이 부림 당했던 그 길을 걷게 되리라고 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내가 과연 그곳에 60여년전에 있었다면 과연 이렇게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싶었다.
브루노가 사는 공관에 와인잔 설거지를 하기 위해 손이 작은 쉬미엘이 온 적 있었다. 브루노는 반가워서 케익도 주고 얘기도 하다가 독일군장교에게 걸렸고 쉬미엘은 브루노가 친구라고 했지만 윽박지르는 장교가 무서운 나머지 처음 보는 사람이며 음식을 훔쳐먹고 있었노라고 거짓말을 한다. 나중에 브루노가 죄책감에 가득 차서 철책에 가서 항상 같은 곳에 앉아있는 쉬뮈엘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한다.
“I’m Really Sorry for what I did. We are still friends, Aren't we?”

한 동안 장교에게 맞아서 퉁퉁 불은 눈덩이를 숨기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쉬미엘은 말없이 고개를 들고 철책 사이로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고 화해의 악수를 받아준다.
인간이 고등지식을 가지고 이렇게 번영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식의 축적이었으며 과거의 한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되돌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지금의 일본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픈 것을 떠나서 측은하기까지 하다. 이에 반하여 철저한 과거 반성을 하는 독일의 모습은 엄숙하기까지 하다. 한 분씩 돌아가시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그럼에도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가지시는 1000회가 훌쩍 넘은 집회를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서 저렇게 역사를 직시하지 못하고 몰상식한 발언을 해대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부끄러운 과거는 외면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브루노의 진심 어린 사과를 정신 나간 어른들이 깊게 새겨 봄 직 한 것 같다.
그 때의 아픔이 그들의 가슴에서 치유되지 않은 채 땅에 묻히기 전에…
“위안부는 강제적이지 않았으며 그들은 ‘매춘부’였다”
“그들에 대한 법정 보상은 끝났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명백한 일본땅이다”


2006년 2월, 입대 전 폴란드의 황량한 한 시골마을이 내겐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밤새 야간열차를 타고 피곤한 천근만근의 몸을 이끌고 내 몸 덩치만큼이나 크고 둔탁한 여행용 캐리어를 기차에서 내리며 차가운 겨울바람을 느꼈던 폴란드의 어느 한 시골마을의 이름은 오슈비엥침(Oswiecim), 우리에게는 독일발음인 ‘아우슈비츠’로 더 유명하게 알려져 있는 비극의 마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못된 짓에 치를 떨곤 한다. 하지만 유대인이 독일나치에 의해 당한 학살에 대해서는 끔찍했다고는 들어왔지만 피부로 느끼기 힘들기 마련이다. 적어도 아우슈비츠를 가는 바로 전 정착지인 폴란드의 Krakow역에 내릴 때까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Krakow역에 내린 시간은 2006년 2월 15일 아침 7시 20분쯤이었다. 1시간 40분 연착하여 도착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행 열차를 오전 9시 5분에 타야 했다. 아우슈비츠역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반경.. 역에서 걸어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박물관으로 갔다. 수용소는 단체관광객들로 붐볐다. 11시 20여분쯤에 시작하여 1시 40분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일부만 돌아보았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힘들었다. 우리가 본 제 1수용소말고 제 2 수용소는 이보다 몇 배나 크다고 한다. 두 번째 수용소인 브졔진카까지 돌아보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첫 번째 수용소에서만 독일나치의 잔혹함을 볼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 누구나 익히 아는 ‘안네의 일기’의 안네의 가족이 몰살된 곳이며,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인 독일장교 쉰들러가 한 사람의 유대인이라도 더 살리려고 노력했던 바로 그 수용소가 위치해 있는 곳은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라는 영화의 배경이기도 하다.
탐험가를 꿈꾸던 아홉 살 브루노는 높은 직위의 독일장교인 아버지의 근무지가 바뀌면서 수용소 주변의 공관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탐험을 하고 싶지만 부모님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관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럴수록 바깥세상에 궁금함을 느끼던 브루노는 결국 철조망 사이로 공관을 탈출하여 수용소의 철조망까지 가게 된다.
그곳에서 또래 친구인 쉬뮈엘을 만나게 된다. 그곳의 사람들은 브루노눈에는 파란색 줄무늬 파자마만 입고 있는 이상한 사람들로 보였고 항상 굶주리고 피곤한 상태로 보였다. 결국 쉬뮈엘과 놀기도 하고 수용소 내에서 사라졌다는 (사실 가스실에서 몰살당했지만) 쉬뮈엘의 아버지를 찾으러 철조망 너머로 들어가게 된다. 쉬뮈엘이 준비해온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채 독일군의 명령에 따라 다른 줄무늬 옷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샤워실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브루노는 돌아오지 못한다.
이 영화는 매우 잔잔하게 브루노의 시각으로 아우슈비츠의 처참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같은 제목의 책으로도 나와있는데 나는 영화로 먼저 접하였다. 그리고 직접 내가 밟았던 땅, 그리고 가스실 바닥, 콘크리트 벽의 손톱자국들이 바로 150만명이 처참하게 몰살된 그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었다. 그렇게 호기심 많은 독일소년도 그렇게 스러져간 것이다. 두 아이들의 우정을 조명하여 유대인 학살의 잔혹한 실태를 더 가슴에 진한 여운이 남도록 제작한 영화인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2006년 2월15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리고 2008년 여름에 방문했던 뮌헨의 다하우 수용소를 내내 떠올리며 가슴에 울렁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이 먹먹함이라고 표현해야 할는지 또는 그 시대가 다 지나고 평화로운 2000년대의 한국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에는 그 유명하고 악명 높은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수용소에 입장하다 보면 좌우로 전기철조망이 두 겹으로 살벌하게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세상과 격리시키고 있다. 수용소 내부에서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느꼈던 살벌함과 잔인함을 느낄 수 있었고 당시 서대문 형무소의 통곡의 미루나무가 아우슈비츠의 시체소각로굴뚝과 오버랩 되어 보였다. 어느 수용소 건물 입구에 쓰여 있던 문구를 잊지 못해 당시 일기에 적어왔는데 이는 바로,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그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였다. 이 문구를 통해 독일인들이 왜 그렇게 유대인 기념 박물관, 유적지들을 곳곳에 만드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브루노가 쉬뮈엘과 줄무늬파자마를 입고 고통스럽게 죽어간 그 가스실, 한 번 들어가면 가스실의 연기로밖에 나갈 수 없는 그곳에 있자니 인간의 잔혹함이 끝이 없다는 것을 당시 뼈저리게 느꼈다.
그들은 내가 수십 년 뒤에 그 고통의 길을, 수백만의 ‘존엄한 생명’들이 하나의 도구 같은 인생을 살며 가축같이 부림 당했던 그 길을 걷게 되리라고 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내가 과연 그곳에 60여년전에 있었다면 과연 이렇게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싶었다.
브루노가 사는 공관에 와인잔 설거지를 하기 위해 손이 작은 쉬미엘이 온 적 있었다. 브루노는 반가워서 케익도 주고 얘기도 하다가 독일군장교에게 걸렸고 쉬미엘은 브루노가 친구라고 했지만 윽박지르는 장교가 무서운 나머지 처음 보는 사람이며 음식을 훔쳐먹고 있었노라고 거짓말을 한다. 나중에 브루노가 죄책감에 가득 차서 철책에 가서 항상 같은 곳에 앉아있는 쉬뮈엘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한다.
“I’m Really Sorry for what I did. We are still friends, Aren't we?”
한 동안 장교에게 맞아서 퉁퉁 불은 눈덩이를 숨기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쉬미엘은 말없이 고개를 들고 철책 사이로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고 화해의 악수를 받아준다.
인간이 고등지식을 가지고 이렇게 번영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식의 축적이었으며 과거의 한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되돌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지금의 일본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픈 것을 떠나서 측은하기까지 하다. 이에 반하여 철저한 과거 반성을 하는 독일의 모습은 엄숙하기까지 하다. 한 분씩 돌아가시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그럼에도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가지시는 1000회가 훌쩍 넘은 집회를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서 저렇게 역사를 직시하지 못하고 몰상식한 발언을 해대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부끄러운 과거는 외면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브루노의 진심 어린 사과를 정신 나간 어른들이 깊게 새겨 봄 직 한 것 같다.
그 때의 아픔이 그들의 가슴에서 치유되지 않은 채 땅에 묻히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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