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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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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선진
댓글 0건 조회 6,347회 작성일 13-03-02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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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에는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된 초라한 왕의 무덤 광해군의 묘가 있다. 비석에는 릉(凌)이 아닌 묘(墓)로 표기하고 있으며, 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따라서 그는 왕위를 계승하기에 정통성이 부족하였다.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빠르게 북상하여 충주까지 점령을 하게 됨으로써 다급해진 선조는 광해를 세자로 삼게 되고, 조선정부를 둘로 나누어 임시정부를 만든다. 광해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의병봉기에 참여하며 조정의 건재함을 알리는데 주력한다. 임진왜란 후 명황제는 선조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라는 칙서와 동시에 광해에게 전라도, 경상도의 군사관련 업무를 전담토록 요구한다. 하지만 이는 선조와 광해 사이의 불화의 씨앗이 된다. 또한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얻게 됨으로써 광해는 더욱 세자의 자리에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광해는 상궁 김개시(일명 : 김개똥)와 가까워지게 되고, 상궁을 통하여 광해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선조에게 전한다. 김개시의 도움으로 광해는 왕세자로 임명된지 16년만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왕위에 오른 직후 광해군은 백성의 삶을 개선시키는데 노력을 하였다. 그 중에 하나로 방납의 폐해를 막기 위해 토지 소유에 따라 과세를 하는 대동법을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방납을 통해 부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은 광해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당시 명은 후금(청)의 세력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구한다. 하지만 광해는 중립외교를 선택하게 되고, 파병을 거부한다. 신하들은 임진왜란 당시 받았던 명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입장이였기 때문에 반발이 심하였다. 광해는 왕좌를 잃을까 극심한 불안에 휩싸이게 되고 대북파와 손을 잡는다. 이이첨(대북파)은 서인과 남인이 모반을 꾸미고 있다고 광해에게 거짓 상소를 올리고 광해는 모반을 사전에 막기 위해 영창대군을 강화로 유배 보내고 서인과 남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하게 된다. 또한 그는 궁 건설을 위해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이로 인해 민심마저 돌아서버리게 만든다. 서인(이귀, 김자점)은 민심을 명분으로 남인의 도움하에 1623년 3월 12일 쿠데타를 일으키고, 내시의 등에 엎혀 도망가는 광해를 붙잡아 석어당에 10년 동안 감금되어 있던 인목대비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든다. 광해는 어머니 유폐, 형제 살해,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죄, 무리한 궁궐공사를 한 죄 등 총 36개 죄목아래 폐위되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또한 광해의 지지기반인 대북파는 서인에 의해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고, 광해를 도운 김개시 또한 살해 당하게 된다.

광해의 일기(‘실록’의 격하된 표현)를 통해 좋은 왕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이며 왕이 무엇을 잃었을 때 성군에서 폭군으로 추락하게 되는가를 생각 할 수 있었다. 정통성이 부족했던 그의 위치에 대한 불안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위치를 보전하기에 급급했던 그의 행동에서 실패한 지도자의 모습을 엿 볼 수 있었다.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정치를 보면 광해군의 삶과 일맥 상통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치인들의 위치, 자신들의 이익, 당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행동들 말이다. 정당간 또는 정치인간의 논쟁은 당연하게 받아 들여 질 수 있겠지만, 국민을 배제한 논쟁은 오직 그들만의 밥그릇 싸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3년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 대선기간 오직 국민을 위하겠다는 공약들과 그들의 태도가 서서히 바뀌어 광해군이 보여주었던 어리석은 자리보전 싸움이라는 형태로 바뀌지 않을까 심히 염려가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도약이라는 것에 조금 더 기대를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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