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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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 (2011)
요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휴대 전화에는 사진을 찍는 기능이 들어있어서 누구나 손쉽게 사진을 찍는, 그야말로 전국민 사진작가의 시대가 되었다. 특히 CCD 등의 개발에 따라 필름을 대체하여 디지털 방식을 이용하는 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사진 촬영에 대한 문턱이 낮아지고, 촬영 결과에 대한 피트백이 빠르게 이루어지면서 사진 촬영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일상의 모습을 쉽게 기록하고 인터넷 환경의 도움으로 지인들과 사진을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게 되었다. 그런데 사진으로 인해 우리는 간혹 불편한 심정을 느끼기도 하고 혹은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한다. 사진이란 찍는 사람이 있다면 찍히는 피사체도 존재하기 때문에 무엇을 찍는지, 혹은 어떻게 찍는지 등에 따라 논쟁의 대상이 될 수가 있는데, 오랫동안 예술로 발전해온 그림 역시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 곁에 넘쳐나는 사진들 속에서 사진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2011년에 출간된 ‘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는 사진을 통해 일어났고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73가지의 논쟁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사진은 세상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논쟁의 중심에 놓였다. 사진이 예술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서 시작해 저작권과 초상권, 내용 조작, 아동 나체, 포르노, 사진가의 윤리 문제 등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논쟁 중이다. 이 책에 실린 73장의 사진은 사진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작품을 고른 것이다. 오늘날의 잣대로 보아도 전시나 출간이 불투명할 정도로 난감한 사진들이 있는가 하면, 익히 보아 온, 그래서 논쟁이 될 만한 어떤 이유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놓인 논쟁은 더욱 뜨겁고 충격적이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반드시 발생하게 되는 문제가 있으니 바로 저작권과 초상권 사이의 대립이다. 특히 보도 사진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 민감하다. 세계 청년의 날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는 세 여성을 찍은 아바스의 사진과 지하철에서 승객을 몰래 촬영한 뤼크 들라예의 사진이 대표적이다. 두 경우 모두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을 찍었고 나중에 언론이나 작품집을 통해 사진이 공개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진이 찍힌 당사자들은 즉시 반발했고 작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른바 초상권과 저작권 사이의 법정 투쟁이었다. 작가들은 보도 사진이나 스냅 사진의 성격상 모든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고 사진을 찍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항변했고, 사진이 찍힌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러나 개인의 권리가 더 중시되는 시대나 사회에서는 법이 어느 쪽을 손을 들어줄지 확신할 수 없다. 저자는 이런 법정 소송이 증가하면서 ‘사진가들이 법정에 불려가기 쉬울 만한 촬영은 주저하면서 결국 자기 검열을 하고야 만다’고 우려를 표한다.
사진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사진이 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굶어 죽어 가는 소녀와, 그 뒤에서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독수리를 찍은 케빈 카터의 사진이다. 이 사진으로 케빈 카터는 퓰리처상을 거머쥐었지만, 수상 두 달 만에 자살했다. 사진가의 윤리 문제가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독수리를 내쫓고 소녀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진가를 몰아세우는 현실의 독수리들이 나타난 것이다. 과연 저와 같은 순간을 맞닥뜨린 사진가의 윤리적 자세란 무엇인가? 카메라를 독수리를 향해 집어 던져야 했을까? 케빈 카터의 죽음은 관찰하고 전달하는 데 뛰어들면서도 그와 동시에 바로 그런 역할 때문에 비난받는 보도 사진가의 역설을 증언한다.
극도의 사실성이라는 특성 덕분에 사진은 다른 예술 분야와 비견되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는 경우가 많다. 곧, 사진은 진실이었다. 백 마디의 말보다 사진 한 장의 위력이 더 강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1989년 로버트 마스가 찍은 루마니아의 인종 학살 참상은 사진의 진실이란 무엇인지 새삼 경계하게 만드는 사진이다. 한 남자가 시체 더미 위에서 울고 있다. 싸늘히 식은 갓난아이의 모습도 보인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문맥상 학살의 현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잔혹한 루마니아 독재 정부에 경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다. 시신들은 공동묘지에서 파낸 것이고, 아이는 며칠 전 식중독으로 돌연사 했을 뿐이다. 남자는 아이의 아버지도 아니었다. 독재 정권이 포악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봉기 주도자들이 연출한 현장을 사진 기자들이 아무 의심 없이 찍고 배포한 것이다. 거짓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타고 이렇게 진실화하는 것이다.
2004년 4월 28일, 미국 CBS 방송사는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감옥에서 미군 병사들에게 고문당한 이라크 수감자들을 보여 주는 사진 여섯 장을 방영했다.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고, 민주주의의 상징 미국은 야만의 국가로 전락했다. 이미지의 힘은 대단해서 소문으로만 존재했던 미군의 고문 행위가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증명된 것이다. 사진에는 조작의 흔적도 없었으며 나체 상태의 수감자 앞에서 야비하게 웃고 있는 현대판 백정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사진의 본질은 무엇일까? 물론 야만적인 미군의 고문 행위가 이 사진 덕에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그것이 전부일까? 저자는 알 권리와 인격권의 갈등이 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사실상 여론이 영웅적 병사를 변태적 고문자로 달리 생각하게 했다면 이미지의 배포는 미국의 적대자들 사이에서 폭력을 포기하게 하든, 복수를 노리든 일종의 분위기를 조장하는 선전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 이 과정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대중 매체의 정치적 참여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어쩌면 이 책 출간 자체가 또 하나의 논쟁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논쟁을 우회하거나, 문제시될 만한 것들을 아예 삭제하는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다. 누구나 사진을 생산할 수 있고, 누구나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 오늘날, 이런 논쟁은 오히려 정면에서 포착해 토론의 장을 마련해야 옳다. 사진은 더 이상 사적인 영역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성격까지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휴대 전화에는 사진을 찍는 기능이 들어있어서 누구나 손쉽게 사진을 찍는, 그야말로 전국민 사진작가의 시대가 되었다. 특히 CCD 등의 개발에 따라 필름을 대체하여 디지털 방식을 이용하는 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사진 촬영에 대한 문턱이 낮아지고, 촬영 결과에 대한 피트백이 빠르게 이루어지면서 사진 촬영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일상의 모습을 쉽게 기록하고 인터넷 환경의 도움으로 지인들과 사진을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게 되었다. 그런데 사진으로 인해 우리는 간혹 불편한 심정을 느끼기도 하고 혹은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한다. 사진이란 찍는 사람이 있다면 찍히는 피사체도 존재하기 때문에 무엇을 찍는지, 혹은 어떻게 찍는지 등에 따라 논쟁의 대상이 될 수가 있는데, 오랫동안 예술로 발전해온 그림 역시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 곁에 넘쳐나는 사진들 속에서 사진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2011년에 출간된 ‘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는 사진을 통해 일어났고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73가지의 논쟁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사진은 세상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논쟁의 중심에 놓였다. 사진이 예술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서 시작해 저작권과 초상권, 내용 조작, 아동 나체, 포르노, 사진가의 윤리 문제 등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논쟁 중이다. 이 책에 실린 73장의 사진은 사진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작품을 고른 것이다. 오늘날의 잣대로 보아도 전시나 출간이 불투명할 정도로 난감한 사진들이 있는가 하면, 익히 보아 온, 그래서 논쟁이 될 만한 어떤 이유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놓인 논쟁은 더욱 뜨겁고 충격적이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반드시 발생하게 되는 문제가 있으니 바로 저작권과 초상권 사이의 대립이다. 특히 보도 사진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 민감하다. 세계 청년의 날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는 세 여성을 찍은 아바스의 사진과 지하철에서 승객을 몰래 촬영한 뤼크 들라예의 사진이 대표적이다. 두 경우 모두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을 찍었고 나중에 언론이나 작품집을 통해 사진이 공개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진이 찍힌 당사자들은 즉시 반발했고 작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른바 초상권과 저작권 사이의 법정 투쟁이었다. 작가들은 보도 사진이나 스냅 사진의 성격상 모든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고 사진을 찍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항변했고, 사진이 찍힌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러나 개인의 권리가 더 중시되는 시대나 사회에서는 법이 어느 쪽을 손을 들어줄지 확신할 수 없다. 저자는 이런 법정 소송이 증가하면서 ‘사진가들이 법정에 불려가기 쉬울 만한 촬영은 주저하면서 결국 자기 검열을 하고야 만다’고 우려를 표한다.
사진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사진이 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굶어 죽어 가는 소녀와, 그 뒤에서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독수리를 찍은 케빈 카터의 사진이다. 이 사진으로 케빈 카터는 퓰리처상을 거머쥐었지만, 수상 두 달 만에 자살했다. 사진가의 윤리 문제가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독수리를 내쫓고 소녀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진가를 몰아세우는 현실의 독수리들이 나타난 것이다. 과연 저와 같은 순간을 맞닥뜨린 사진가의 윤리적 자세란 무엇인가? 카메라를 독수리를 향해 집어 던져야 했을까? 케빈 카터의 죽음은 관찰하고 전달하는 데 뛰어들면서도 그와 동시에 바로 그런 역할 때문에 비난받는 보도 사진가의 역설을 증언한다.
극도의 사실성이라는 특성 덕분에 사진은 다른 예술 분야와 비견되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는 경우가 많다. 곧, 사진은 진실이었다. 백 마디의 말보다 사진 한 장의 위력이 더 강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1989년 로버트 마스가 찍은 루마니아의 인종 학살 참상은 사진의 진실이란 무엇인지 새삼 경계하게 만드는 사진이다. 한 남자가 시체 더미 위에서 울고 있다. 싸늘히 식은 갓난아이의 모습도 보인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문맥상 학살의 현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잔혹한 루마니아 독재 정부에 경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다. 시신들은 공동묘지에서 파낸 것이고, 아이는 며칠 전 식중독으로 돌연사 했을 뿐이다. 남자는 아이의 아버지도 아니었다. 독재 정권이 포악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봉기 주도자들이 연출한 현장을 사진 기자들이 아무 의심 없이 찍고 배포한 것이다. 거짓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타고 이렇게 진실화하는 것이다.
2004년 4월 28일, 미국 CBS 방송사는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감옥에서 미군 병사들에게 고문당한 이라크 수감자들을 보여 주는 사진 여섯 장을 방영했다.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고, 민주주의의 상징 미국은 야만의 국가로 전락했다. 이미지의 힘은 대단해서 소문으로만 존재했던 미군의 고문 행위가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증명된 것이다. 사진에는 조작의 흔적도 없었으며 나체 상태의 수감자 앞에서 야비하게 웃고 있는 현대판 백정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사진의 본질은 무엇일까? 물론 야만적인 미군의 고문 행위가 이 사진 덕에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그것이 전부일까? 저자는 알 권리와 인격권의 갈등이 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사실상 여론이 영웅적 병사를 변태적 고문자로 달리 생각하게 했다면 이미지의 배포는 미국의 적대자들 사이에서 폭력을 포기하게 하든, 복수를 노리든 일종의 분위기를 조장하는 선전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 이 과정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대중 매체의 정치적 참여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어쩌면 이 책 출간 자체가 또 하나의 논쟁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논쟁을 우회하거나, 문제시될 만한 것들을 아예 삭제하는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다. 누구나 사진을 생산할 수 있고, 누구나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 오늘날, 이런 논쟁은 오히려 정면에서 포착해 토론의 장을 마련해야 옳다. 사진은 더 이상 사적인 영역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성격까지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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