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너였다
페이지 정보

본문
모든 순간이 너였다
하태완 지음
우리는 가끔, 마음속 깊은 서랍에 꼭꼭 넣어둔 얼굴 하나를 꺼내 본다. 이름을 부르지도, 연락을 하지도 못한 채, 오래전의 온기를 그대로 품고 있는 그 사람. 시간이 흐르면 무뎌질 거라 생각했던 마음은, 오히려 불쑥 살아나 하루를 집어삼키곤 한다. 하태완의 '모든 순간이 너였다'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웃게 만들고, 울게 했으며,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던 한 사람. 책 속 문장들이 마치 그 시절의 공기와 표정, 그리고 내 마음을 그대로 불러낸 듯했다.
이 책은 화려하거나 복잡한 수사를 쓰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하고 단정한 언어로, 사랑이 싹틀 때의 떨림, 함께 있는 동안 생겨나는 미묘한 균열, 그리고 이별 뒤의 허전함까지를 잇는다. 페이지를 따라가다 보면 사랑이 단지 달콤하거나 쓰라린 감정이 아니라, 시간을 함께 통과한 두 사람의 기록이라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특히 “그때 너를 사랑했던 나도 참 예뻤다”라는 구절은, 나의 시선을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돌려놓았다. 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했던 시간 속의 나는, 부족했더라도 충분히 빛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나는 평소에 마음을 쉽게 꺼내는 사람이 아니다. 좋음도, 서운함도 속으로 삼킨 채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하지만 그 침묵이 결국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는 걸,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책 속의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했다. 그건 착각이었다”라는 한 문장은, 예전에 미루고 숨겼던 말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용기를 냈다면 조금은 다른 결말이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스쳤지만, 동시에 그 시절의 나를 변명 없이 인정하고 싶어졌다.
사랑이라는 건 참 모순적이다. 세상이 다 내 것처럼 행복하게 만들다가도, 한마디 말이나 사소한 표정에 마음이 무너진다. 나는 그 불안 속에서 자주 흔들렸고, 사랑을 유지할 자신이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책 속의 문장들은 이런 마음을 특별한 결함이 아니라 사랑이 가진 한 단면으로 보여줬다. 나만 이런 게 아니라는 안도감, 그리고 그 불안조차도 누군가를 깊이 품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이라는 자각이 마음을 가볍게 했다.
이별을 다룬 대목들은 오래 시선을 붙잡았다. 그리움이란, 단순한 미련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내 삶에 남긴 흔적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마음에 깊이 박혔다. 나 역시 이별을 겪으며, 한 관계가 끝난다는 건 한 계절이 통째로 사라지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처음엔 빈자리가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 시간 덕분에 나를 돌아보고 조금은 단단해질 수 있었다. 책은 그 과정을 애써 위로하지 않고, 조용히 곁에 서서 함께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그리움을 좋아했는지도 몰라.”
이 문장은 오래 곱씹게 만들었다. 아픈 마음을 왜 좋아한다고 할까 싶었지만, 곧 이해했다. 그리움은 나를 괴롭히는 동시에, 누군가가 내게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슬픔의 껍질을 쓰고 있어도, 그 안에는 빛나던 순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책장을 덮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마음이 생기면 미루지 않고 말할 것, 사랑이든 그리움이든 숨기지 않을 것. 그리고 언젠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 너를 사랑했던 나, 참 잘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괜찮다.”
'모든 순간이 너였다'는 결국, 누군가의 이야기를 빌려 나를 들여다보게 한 책이었다. 사랑을 시작했던 나, 불안 속에 흔들리던 나, 이별 후에도 오래 멈춰 있던 나, 혼자만의 시간을 지나오며 조금씩 변한 나. 그 모든 나를 부끄럽지 않게 받아들이게 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그 모든 순간이 결국 나를 만든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그 시간들을 소중히 안고 살아갈 것이다.
- 이전글결국, 몰락하는가 전락하는가 25.08.10
- 다음글여행의 이유 – 김영하 25.08.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