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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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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천용
댓글 0건 조회 6,731회 작성일 13-01-0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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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나오기 전, 엄마 배 속에 있었을 시절부터 교회를 다닌 ‘모태 신앙’이다. 어려서부터 교회 문화에 익숙했던 나에게 교회를 다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모태 신앙인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나의 믿음도 흔들리는 시기가 찾아 왔는데, 다시금 더욱 확고하게 붙잡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은혜를 깨달으면서부터이다.

은혜란 무엇일까.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져 있는 의미로서의 은혜는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을 의미한다. 스승의 은혜 혹은 은혜 갚은 까치에서 사용되는 은혜가 바로 그런 의미를 갖는다 할 수 있겠다. 반면에 약간은 다른 의미로써의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값없이 조건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개념이다. 이것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겐 쉽게 받아들이거나 인정할 수 없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라면을 먹으려면 2천원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고 스테이크를 먹기 위해서는 3만원을 지불해야 한다. 숙제를 안 해 왔으면 혼이 나야 하는 것이고 공부를 잘하면 자랑스러운 아들이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나의 능력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더 나아가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다. 이 두 번째 의미의 은혜로 인해 나를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찾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마음의 위로를 받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은혜에 대해 쓰여진 책이며 그 놀라움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색다를 계산법을 통해 은혜를 설명한다.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 양떼를 그냥 두고 어둠 속에 뛰어드는 목자 이야기(한 마리 양을 찾아 왔더라도 돌아와 보니 스물세 마리 양이 사라져있다면 어땠을까). 1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향유 0.5리터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여자를 예수님이 칭찬하는 이야기(바닥에 흐르는 향품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과부의 동전 두 닢이 다른 이들의 고액 헌금보다 많다고 말씀 하신 예수님의 이야기. 하루 꼬박 일한 일꾼과 한 시간도 일하지 않은 일꾼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급한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 성경의 이 비유들은 경제적으로 보면 전혀 말이 안 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비유들을 통해 은혜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는데, 즉 은혜는 계산할 수 있거나 노력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받는 것이란 점이다. 따라서 수백명을 죽인 살인자도, 수억원을 가로챈 사기범도 은혜로써(혹자들은 말도 안 되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공부를 조금 못해도 존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학생이 자신의 성적 비관을 이유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 눈이 좀 작거나 코가 낮아도 사랑받을 수 있음에도 더욱더 예뻐지고자 하는 여성의 성형 중독 이야기 등의 비은혜가 낳은 비극적 기사들을 맞이할 때면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비은혜적인 요소들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나 은혜를 보여주고 경험토록 도와야 마땅한 교회에서조차 사람을 그 사람의 지위나 재산으로 평가하거나 심지어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끼리 어울리려 하는 등의 비은혜적 모습들을 볼 때면, 안타까운 걸 넘어서서 화가 나기도 한다.

요즘 흥행하고 있는 영화 ‘레미제라블’은 은혜의 힘과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잘 보여준다. 빵 한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은, 전과자라는 이유로 모두의 박해를 받는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해 분노가 치밀고 세상을 향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 있던 그 때, 한 신부가 베푼 은혜를 통해 그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분노는 감사로, 증오는 사랑으로 바뀌고 장발장은 또 새로운 은혜들을 베풀며 살아간다. 모두가 손가락질하던 전과범을 귀중한 손님으로 환대하는 걸 넘어서, 은그릇을 훔쳐 간 그를 용서하고 은촛대까지 넘겨주는 신부의 ‘바보짓’이 또 다른 바보를 낳았다. 비은혜의 되물림이 은혜를 만나 은혜의 되물림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똑똑해지려 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선호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바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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