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 김병로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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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 김병로 평전
표사유피인사유명 [豹死留皮人死留名], 즉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어구를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중요히 여기지 않는 반면에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선각자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명예나 의를 더 중요시 여겼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다수의 위인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애를 살펴보자면, 내용을 다를지언정 그 인물이 한결같이 추구하고자 했던 궁극적인 뜻은 유교사상의 ‘인의예지’에 잘 부합됨을 알 수 있다. 특히,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러한 선각자들이 눈에 띄게 등장하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 더러 있다. 작년 이맘때쯤인가 읽었던 간송 전형필 선생이 바로 이러한 잘 알려지지 않은 선각자들의 대표적인 예였는데, 또 다른 한 분의 생애를 뒤늦게 접하고 나서 찾아보았다.
가인 김병로 선생은 법학계 쪽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로 6.25 전쟁을 전후로 약 9년 동안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신 분이다. 그의 학문적 지식이 높아서 대법원장을 지낸 것이라면 법학계 쪽에서만 알려져도 되는 인물이겠지만, 그가 살아온 인생을 살펴보면 역시 시대의 선각자는 평범한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수의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그랬듯, 김병로 선생의 부친 또한 조선조 때 사간원의 간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일찍이 학문을 익힐 수 있었던 그는 17세 때 유교학의 대가인 전우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고 목포의 일신학교에 들어가 영어나 수학, 세계 역사학과 같은 그 당시 신학문을 배우는데 몰두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못 있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울분을 참지 못하고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그만 두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의병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24세의 나이에 법학에 눈을 뜨고 5년여의 일본 유학 시절을 보낸 뒤 돌아와 경성법학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등지에서 그의 전공 과목인 형법과 형사소송법을 강의하여 후학 배출에 전념하게 된다. 하지만, 일제치하에서 조선인들이 인권이 유린당하는 것을 본 그는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일정기간의 판사 생활을 한 후 변호사로 개업을 하였다. 그런 뒤에 일제에 항거하다 잡힌 많은 애국자들을 위해 변호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3.1 운동과 6.10 만세 운동, 1929년 광주학생사건 등과 같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가 적극적으로 애국자들의 변호를 한 부분들을 보면 그는 적극적인 투쟁만이 독립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하였다.
일제 해방 후 유엔의 감시 아래 첫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입법부가 형성되고 그 해 제헌절에 대한민국 헌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명실상부한 하나의 국가의 틀을 잡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곧이어 대법원장으로 인준됨으로써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다. 6.25 전쟁 이후 다시 대법원장으로 임명됨에 따라 그는 1957년까지 9년여 동안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 직을 역임하였다. 앞서 애국투사들을 위해 독립운동의 또 다른 형태인 변호사 업을 한 일도 높이 평가 받아야 할 부분이지만, 그가 초대 대법원장 직을 수행할 때에도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인품과 관련된 부분이다. 현재의 법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당시 법관의 처우는 열악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대법원장인 그가 정부에서 내려온 예산 중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 오히려 예산을 국가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다른 정부부처보다 훨씬 적은 예산을 집행해야 하다 보니 월급은 박봉에 왠만큼 추운 날이 아니고서는 난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법관들이 불만을 토로할 때 마다 그는 ‘나라의 녹을 먹는 우리가 아니면 누가 우리의 산업을 키웁니까’하며 다독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가장 큰 신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공직자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시 해야 할 덕목은 바로 청렴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신념답게 대법원장이 그 또한 죽으로 끼니를 버틸 때가 있었다고 하니 그의 진정성은 의심할 여지 없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청렴과 더불어 그의 또 다른 신념이라고 할 수 있는 ‘법치’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대법원장 직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직책이다. 때문에 대통령이 멀리하는 또는 대통령에 반하는 법관으로써는 절대로 될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알게 모르게 대법원장으로써는 대통령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독재를 연장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사사오입을 통해 입법부에서 개헌을 했을 때도 그는 비록 정당한 법적인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법일지라도 그 내용이 헌법에 위배되면 국민은 입법부에 반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독립국가 이어야만 했고, 단순히 일제치하에서 벗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민에 의한 나라가 되기를 바랬다는 점에서, 그래서 자신을 임명해 준 대통령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대한민국에 대한 진정성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도 그에게 사임을 요구했지만, 그는 정년퇴임 때까지 대법원장 직을 수행하였다. (법적으로 물러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토록 대한민국의 독립, 민주주의 실현 및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온 그 덕분에 현재의 우리나라 사법부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비록 현재에 이르러 문제점이 몇몇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도입한 시기를 생각해 보았을 때 충분히 있음직한 일들이긴 하다. 다만, 현재에도 김병로 선생과 같은 분 같은 선각자가 있다면 이러한 문제점이 애초에 생기지 않도록 또 앞으로도 생기지 못하도록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금 그의 일대기를 생각해 본다.
표사유피인사유명 [豹死留皮人死留名], 즉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어구를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중요히 여기지 않는 반면에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선각자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명예나 의를 더 중요시 여겼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다수의 위인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애를 살펴보자면, 내용을 다를지언정 그 인물이 한결같이 추구하고자 했던 궁극적인 뜻은 유교사상의 ‘인의예지’에 잘 부합됨을 알 수 있다. 특히,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러한 선각자들이 눈에 띄게 등장하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 더러 있다. 작년 이맘때쯤인가 읽었던 간송 전형필 선생이 바로 이러한 잘 알려지지 않은 선각자들의 대표적인 예였는데, 또 다른 한 분의 생애를 뒤늦게 접하고 나서 찾아보았다.
가인 김병로 선생은 법학계 쪽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로 6.25 전쟁을 전후로 약 9년 동안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신 분이다. 그의 학문적 지식이 높아서 대법원장을 지낸 것이라면 법학계 쪽에서만 알려져도 되는 인물이겠지만, 그가 살아온 인생을 살펴보면 역시 시대의 선각자는 평범한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수의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그랬듯, 김병로 선생의 부친 또한 조선조 때 사간원의 간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일찍이 학문을 익힐 수 있었던 그는 17세 때 유교학의 대가인 전우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고 목포의 일신학교에 들어가 영어나 수학, 세계 역사학과 같은 그 당시 신학문을 배우는데 몰두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못 있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울분을 참지 못하고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그만 두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의병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24세의 나이에 법학에 눈을 뜨고 5년여의 일본 유학 시절을 보낸 뒤 돌아와 경성법학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등지에서 그의 전공 과목인 형법과 형사소송법을 강의하여 후학 배출에 전념하게 된다. 하지만, 일제치하에서 조선인들이 인권이 유린당하는 것을 본 그는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일정기간의 판사 생활을 한 후 변호사로 개업을 하였다. 그런 뒤에 일제에 항거하다 잡힌 많은 애국자들을 위해 변호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3.1 운동과 6.10 만세 운동, 1929년 광주학생사건 등과 같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가 적극적으로 애국자들의 변호를 한 부분들을 보면 그는 적극적인 투쟁만이 독립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하였다.
일제 해방 후 유엔의 감시 아래 첫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입법부가 형성되고 그 해 제헌절에 대한민국 헌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명실상부한 하나의 국가의 틀을 잡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곧이어 대법원장으로 인준됨으로써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다. 6.25 전쟁 이후 다시 대법원장으로 임명됨에 따라 그는 1957년까지 9년여 동안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 직을 역임하였다. 앞서 애국투사들을 위해 독립운동의 또 다른 형태인 변호사 업을 한 일도 높이 평가 받아야 할 부분이지만, 그가 초대 대법원장 직을 수행할 때에도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인품과 관련된 부분이다. 현재의 법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당시 법관의 처우는 열악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대법원장인 그가 정부에서 내려온 예산 중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 오히려 예산을 국가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다른 정부부처보다 훨씬 적은 예산을 집행해야 하다 보니 월급은 박봉에 왠만큼 추운 날이 아니고서는 난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법관들이 불만을 토로할 때 마다 그는 ‘나라의 녹을 먹는 우리가 아니면 누가 우리의 산업을 키웁니까’하며 다독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가장 큰 신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공직자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시 해야 할 덕목은 바로 청렴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신념답게 대법원장이 그 또한 죽으로 끼니를 버틸 때가 있었다고 하니 그의 진정성은 의심할 여지 없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청렴과 더불어 그의 또 다른 신념이라고 할 수 있는 ‘법치’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대법원장 직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직책이다. 때문에 대통령이 멀리하는 또는 대통령에 반하는 법관으로써는 절대로 될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알게 모르게 대법원장으로써는 대통령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독재를 연장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사사오입을 통해 입법부에서 개헌을 했을 때도 그는 비록 정당한 법적인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법일지라도 그 내용이 헌법에 위배되면 국민은 입법부에 반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독립국가 이어야만 했고, 단순히 일제치하에서 벗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민에 의한 나라가 되기를 바랬다는 점에서, 그래서 자신을 임명해 준 대통령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대한민국에 대한 진정성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도 그에게 사임을 요구했지만, 그는 정년퇴임 때까지 대법원장 직을 수행하였다. (법적으로 물러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토록 대한민국의 독립, 민주주의 실현 및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온 그 덕분에 현재의 우리나라 사법부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비록 현재에 이르러 문제점이 몇몇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도입한 시기를 생각해 보았을 때 충분히 있음직한 일들이긴 하다. 다만, 현재에도 김병로 선생과 같은 분 같은 선각자가 있다면 이러한 문제점이 애초에 생기지 않도록 또 앞으로도 생기지 못하도록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금 그의 일대기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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