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 후세다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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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삼월 일일은 일제치하의 치욕적인 역사속에서 조국을 위해 몸 바쳤던 위대한 독립투사들의 넋을 기리고, 삼일운동의 정신을 되새기게 하는 날이다. 또한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의 만행에 대해 질타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의 인권변호사 후세다츠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처음으로 일본인에 대한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으로써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으며, 법정에서 조선 독립투사들을 변호하는 조선 민중을 생각하는 변호사였기 때문이다.
1919년 2월 8일 일본에서 유학중인 조선청년독립단원 및 재일 유학생 600여명은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강조하는 28독립선언을 하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독립선언서와 함께 일본 곳곳에 뿌려지게 되지만,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11명의 학생들이 체포된다.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조선인은 국가를 운용한 능력이 없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내란죄를 적용하여, 조선 청년들에게 중형의 선고를 내릴 방침이었지만, 인권변호사 후세다츠지는 청년들의 독립운동은 정당하고, 강제해산을 통한 일본경찰의 강압적인 조치를 맹비난하며 그들을 변호했다. 그의 노력으로 조선청년들은 출판법위반죄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24년 1월 5일 독립투사 김지섭은 일본왕궁에서 고위 관료들을 향한 폭탄투척의 거사를 행하였지만, 폭탄불발에 의한 거사실패와 함께 현장에서 체포되어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그러나 후세는 조선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폭탄불발등의 증거로 사형의 부당성을 주장하였고, 열사 김지섭은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게 된다. 그는 수임료없이 조선인들을 변호하였으며 현재 그의 집에 있는 고려청자 하나가 조선인들의 고마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조선의 독립에 크게 기여한바 대한민국정부의 건국훈장을 수여받는 최초의 일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어릴적부터 서양의 근대사상 및 동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자기만의 생각을 키웠다. 특히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해야한다는 묵자의 겸애주의를 바탕으로 나라와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사랑을 중시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후 일본정부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타고,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흘려 조선인 6000여명이상이 학살되게 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후세는 자신의 몸을 던져 조선인을 보호하고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일본정부의 입장에서는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후세는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실형선고를 받으며, 또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일본에서 검사로써 또는 변호사로써 성공한 위치에서 충분히 살 수 있었던 그의 삶이지만, 조선인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조선인을 위해 전생애를 헌신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적인 이익만을 쫓지 않으며, 강자와 약자가 아닌 서로를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며, 부당함이 있을 때 정의라는 단어아래 당당해 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는 소통이 원활하지 않는 것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후세의 삶을 통해서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소통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일하게 생각하고 사랑해야한다는 겸애사상의 부족, 바로 우리 삶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이기심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1919년 2월 8일 일본에서 유학중인 조선청년독립단원 및 재일 유학생 600여명은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강조하는 28독립선언을 하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독립선언서와 함께 일본 곳곳에 뿌려지게 되지만,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11명의 학생들이 체포된다.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조선인은 국가를 운용한 능력이 없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내란죄를 적용하여, 조선 청년들에게 중형의 선고를 내릴 방침이었지만, 인권변호사 후세다츠지는 청년들의 독립운동은 정당하고, 강제해산을 통한 일본경찰의 강압적인 조치를 맹비난하며 그들을 변호했다. 그의 노력으로 조선청년들은 출판법위반죄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24년 1월 5일 독립투사 김지섭은 일본왕궁에서 고위 관료들을 향한 폭탄투척의 거사를 행하였지만, 폭탄불발에 의한 거사실패와 함께 현장에서 체포되어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그러나 후세는 조선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폭탄불발등의 증거로 사형의 부당성을 주장하였고, 열사 김지섭은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게 된다. 그는 수임료없이 조선인들을 변호하였으며 현재 그의 집에 있는 고려청자 하나가 조선인들의 고마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조선의 독립에 크게 기여한바 대한민국정부의 건국훈장을 수여받는 최초의 일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어릴적부터 서양의 근대사상 및 동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자기만의 생각을 키웠다. 특히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해야한다는 묵자의 겸애주의를 바탕으로 나라와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사랑을 중시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후 일본정부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타고,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흘려 조선인 6000여명이상이 학살되게 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후세는 자신의 몸을 던져 조선인을 보호하고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일본정부의 입장에서는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후세는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실형선고를 받으며, 또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일본에서 검사로써 또는 변호사로써 성공한 위치에서 충분히 살 수 있었던 그의 삶이지만, 조선인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조선인을 위해 전생애를 헌신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적인 이익만을 쫓지 않으며, 강자와 약자가 아닌 서로를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며, 부당함이 있을 때 정의라는 단어아래 당당해 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는 소통이 원활하지 않는 것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후세의 삶을 통해서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소통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일하게 생각하고 사랑해야한다는 겸애사상의 부족, 바로 우리 삶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이기심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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