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과 실리의 중요성 -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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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금의 계보를 보면 ‘조’나 ‘종’이 아닌 임금이 딱 2명이 있다. 한 명은 연산군이고 다른 한명은 광해군이다. 임금에 있어서 ‘군’이란 표현은 쫓겨난 왕을 의미한다. 실제로 연산군과 광해군 모두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연산군과 광해군은 후세의 조선시대 역사서에서는 왕위에서 쫓겨날 만큼 나쁜 임금으로 묘사되고 있다. 연산군에 대해서는 그것이 타당하지만, 광해군에 대해서는 현재의 역사가들의 평가는 조선시대의 평가와 전혀 다르다.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는 오랜기간 동안 왕위를 이을 적자를 가지지 못했다. 그의 아들은 13명이나 있었지만 이들 모두 후궁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선조가 눈여겨 본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던 광해군이었다. 그래서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하게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선조의 광해군에 대한 생각은 바뀌게 된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충청도에 도달하자 선조는 궁을 버리고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된다. 당장의 안전을 위해 잠시 피난을 간 것이라는 명분이었다. 왕이 전쟁의 선봉에서 지휘를 하기는커녕 의주로 피난을 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궁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일삼게 된다. 그렇게 선조에 대한 백성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이때 광해군은 강원도 이천까지 내려와 지방 각지를 다니며 백성을 달래고 의병들의 전투를 격려하는 등 항전 활동에 앞장섰다. 또한 의병들에게도 관군과 마찬가지로 군량을 보급하고 면세 혜택을 내리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전국의 의병을 조직적으로 지휘함으로써 조선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왜군의 보급로는 차단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훗날 바른 정치라고 평가받는 정치를 하게 된다. 그 당시 광해군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즉위 초 대동법을 실시하게 한다. 대동법은 백성들이 공물로 특산품을 바치는 대신 쌀을 낼 수 있게 만든 제도이다. 당시 방납인들은 특산품을 대신 배달해주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기에 대동법 실시는 이러한 방납의 폐해를 막을 수 있었고 이 때문에 백성들이 기념비를 세웠을 정도로 대동법은 백성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양반지주들의 비방이 들끓었고 방납인들의 항의도 계속되어서 결국 경기도 지역에서만 대동법을 유지하고 다른 지역으로 확대 실시하지는 못했다. 비록 개혁 정책이 큰 빛을 보진 못했지만 그 당시 상황 속에서 백성의 형편을 가장 먼저 생각해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겠다.
광해군은 개혁 정책뿐만 외교에 있어서도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광해군이 즉위한지 10년이 되던 1618년 명나라에서 후금과의 전투를 위해 조선에 군대를 요청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과거 명나라가 조선과 함께 왜군을 물리친 점을 명분 삼아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광해군은 훈련되지 않은 조선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광해군 자신도 명나라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점에는 부인할 수 없었지만, 임진왜란의 후유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그 당시 상황에서 만약 파병을 할 경우 보나마나 급속하게 떠오르고 있는 후금에 원한을 살 것이고 만약 후금의 침략을 받을 경우 또 다시 임진왜란과 같은 시련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가급적이면 거부 혹은 최후의 순간까지 미루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하들이 내세운 강력한 명분 앞에 조선은 군사를 파병하였고 파병한지 불과 불과 보름만에 대패하고 조선군의 사령관이었던 강홍립은 후금의 수도로 들어가 항복한다. 하지만 강홍립의 항복은 광해군의 뜻이었다. 강홍립은 후금에게 조선의 부득이한 입장을 전하려고 애썼다. 즉, 명나라의 입장을 생각해서 참전한 것을 뿐 조선은 후금과 전쟁을 치를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의 대륙의 상황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을 때 광해군의 지시는 불필요한 후금과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광해군은 명분이 아닌 조선의 실리를 택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신하들은 조선의 실리 보다는 명분을 중요시 여겼고 이 때문에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기에 이른다. 궁내의 호위무사들 조차 반정에 가담했을 정도로 광해군의 뜻을 헤아리는 신하는 거의 없었다. 인조반정 당시 반정세력들이 내세운 쿠테타의 명분은 재조지은(명이 조선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 명의 은혜를 배신하고 후금과 내통한 광해군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에는 조선의 안위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후금(나중에 청나라가 됨)은 인조와 서인 정권이 후금에 대해 강경한 노선을 고수하자 총병력을 동원해서 다시 쳐들어 온 것이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병자호란을 겪은 후 청과 군신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조선의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절을 하고 머리를 숙이는 치욕적인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결국 인조반정이 남긴 것은 결국 조선을 기울게 한 치욕의 역사였다. 인조반정 주체들이 내세웠던 반전의 명분은 백성을 위한다거나 조선을 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집권을 위한 하나의 구실이었을 뿐 광해군 폐위에 정당한 명분이 될 수 없었다. 대륙의 정세가 급변했던 17세기 초 광해군은 시대의 변화를 앞서 읽었으며 그 변화 속에서 조선의 살길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준비했던 선구적인 임금이었다.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 정책은 현재 상황에서도 유효하다. 전 세계 유일한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는 현재에도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의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과거 한국전쟁 시 미국이 우리나라(남한)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아야 혹은 알아야 한다는 정치가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으로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또 한미 FTA와 같은 조약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통령이나 관료, 정치가들은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실리를 고려하고 있는가? 혹은 여전히 5백여년 전의 신하들이 일관되게 주장했던 명분만을 고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는 오랜기간 동안 왕위를 이을 적자를 가지지 못했다. 그의 아들은 13명이나 있었지만 이들 모두 후궁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선조가 눈여겨 본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던 광해군이었다. 그래서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하게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선조의 광해군에 대한 생각은 바뀌게 된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충청도에 도달하자 선조는 궁을 버리고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된다. 당장의 안전을 위해 잠시 피난을 간 것이라는 명분이었다. 왕이 전쟁의 선봉에서 지휘를 하기는커녕 의주로 피난을 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궁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일삼게 된다. 그렇게 선조에 대한 백성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이때 광해군은 강원도 이천까지 내려와 지방 각지를 다니며 백성을 달래고 의병들의 전투를 격려하는 등 항전 활동에 앞장섰다. 또한 의병들에게도 관군과 마찬가지로 군량을 보급하고 면세 혜택을 내리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전국의 의병을 조직적으로 지휘함으로써 조선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왜군의 보급로는 차단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훗날 바른 정치라고 평가받는 정치를 하게 된다. 그 당시 광해군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즉위 초 대동법을 실시하게 한다. 대동법은 백성들이 공물로 특산품을 바치는 대신 쌀을 낼 수 있게 만든 제도이다. 당시 방납인들은 특산품을 대신 배달해주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기에 대동법 실시는 이러한 방납의 폐해를 막을 수 있었고 이 때문에 백성들이 기념비를 세웠을 정도로 대동법은 백성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양반지주들의 비방이 들끓었고 방납인들의 항의도 계속되어서 결국 경기도 지역에서만 대동법을 유지하고 다른 지역으로 확대 실시하지는 못했다. 비록 개혁 정책이 큰 빛을 보진 못했지만 그 당시 상황 속에서 백성의 형편을 가장 먼저 생각해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겠다.
광해군은 개혁 정책뿐만 외교에 있어서도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광해군이 즉위한지 10년이 되던 1618년 명나라에서 후금과의 전투를 위해 조선에 군대를 요청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과거 명나라가 조선과 함께 왜군을 물리친 점을 명분 삼아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광해군은 훈련되지 않은 조선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광해군 자신도 명나라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점에는 부인할 수 없었지만, 임진왜란의 후유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그 당시 상황에서 만약 파병을 할 경우 보나마나 급속하게 떠오르고 있는 후금에 원한을 살 것이고 만약 후금의 침략을 받을 경우 또 다시 임진왜란과 같은 시련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가급적이면 거부 혹은 최후의 순간까지 미루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하들이 내세운 강력한 명분 앞에 조선은 군사를 파병하였고 파병한지 불과 불과 보름만에 대패하고 조선군의 사령관이었던 강홍립은 후금의 수도로 들어가 항복한다. 하지만 강홍립의 항복은 광해군의 뜻이었다. 강홍립은 후금에게 조선의 부득이한 입장을 전하려고 애썼다. 즉, 명나라의 입장을 생각해서 참전한 것을 뿐 조선은 후금과 전쟁을 치를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의 대륙의 상황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을 때 광해군의 지시는 불필요한 후금과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광해군은 명분이 아닌 조선의 실리를 택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신하들은 조선의 실리 보다는 명분을 중요시 여겼고 이 때문에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기에 이른다. 궁내의 호위무사들 조차 반정에 가담했을 정도로 광해군의 뜻을 헤아리는 신하는 거의 없었다. 인조반정 당시 반정세력들이 내세운 쿠테타의 명분은 재조지은(명이 조선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 명의 은혜를 배신하고 후금과 내통한 광해군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에는 조선의 안위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후금(나중에 청나라가 됨)은 인조와 서인 정권이 후금에 대해 강경한 노선을 고수하자 총병력을 동원해서 다시 쳐들어 온 것이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병자호란을 겪은 후 청과 군신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조선의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절을 하고 머리를 숙이는 치욕적인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결국 인조반정이 남긴 것은 결국 조선을 기울게 한 치욕의 역사였다. 인조반정 주체들이 내세웠던 반전의 명분은 백성을 위한다거나 조선을 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집권을 위한 하나의 구실이었을 뿐 광해군 폐위에 정당한 명분이 될 수 없었다. 대륙의 정세가 급변했던 17세기 초 광해군은 시대의 변화를 앞서 읽었으며 그 변화 속에서 조선의 살길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준비했던 선구적인 임금이었다.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 정책은 현재 상황에서도 유효하다. 전 세계 유일한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는 현재에도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의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과거 한국전쟁 시 미국이 우리나라(남한)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아야 혹은 알아야 한다는 정치가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으로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또 한미 FTA와 같은 조약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통령이나 관료, 정치가들은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실리를 고려하고 있는가? 혹은 여전히 5백여년 전의 신하들이 일관되게 주장했던 명분만을 고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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