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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 유산 지킴이 - 간송 전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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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윤상
댓글 0건 조회 5,746회 작성일 14-04-11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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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 유산 지킴이 – 간송 전형필

대개 일제시대의 항일운동을 말할 때에는 주로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해, 중경 등지에 세워졌었던 임시정부와 간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항일 독립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등과 같은 위인들에 대해서는 일찍이 초,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위인들만이 항일 운동을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물리적으로 일제에 항거한 분들과 달리 다른 방법으로 일제 탄압에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들의 그 당시 노력을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 간송 전형필 선생 이란 분이 있다.

간송 전형필은 서울의 손이 귀한 대재력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도서 수집을 좋아했던 그는 유년기 시절 조부모에 이어 양부와 친형까지 죽으면서 가족들이 가지고 있던 엄청난 부가 그에게 상속된다. 일본 유학을 떠난 후로 그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 돌아와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는 도서문고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그 와중에 위창 오세창 선생을 만나게 된다. 오세창 선생은 독립투사이자 서예가로서 최고의 서화감시관의 소유자였다. 전형필은 오세창 선생의 도움을 받아 우리문화유산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는다. 바로 우리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이다.

이 당시 일본은 수많은 우리 문화 유산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향교나 절 등지에 있던 조각상이나 탑 등과 같은 문화재들은 물론이고, 수 많은 무덤을 도굴하여 경성미술구락부(그 당시의 경매장)로 넘겼고, 이 문화재들은 돈이 많은 일본인 정치가나 수집가들에게 팔려나갔다. 초대 조선통감을 지냈던 이토 히로부미는 많은 돈을 들여 경매장에서 구입한 우리 문화재들을 일본 왕족과 정치인들에게 선물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비참한 현실에서 간송은 독립운동의 문화적 형태인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본격적인 문화재 수집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수집한 문화재는 5천여점이 넘는다고 한다. 해방 전까지 계속된 우리 문화재 수집은 해방이 되면서 멈춰진다. 해방이 되었으니 우리 문화재는 우리 국민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이 수집하여 지킬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대목만 보더라도 그는 그가 수집한 문화재를 단순한 금전 가치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집된 문화재에는 국보로 지정된 것이 무려 14점, 보물로 지정된 것이 12점에 달한다. 한 개인이 이만큼의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특히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 원본은 발견 당시 이를 국보 1호로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을 만큼 귀한 자료이다. 간송은 이것을 수집하던 시기는 일본이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키고 조선어학회를 탄압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위험을 무릎쓰고 그는 거금 1만원(그 당시 집 10채 값에 해당)을 지급하고 수집하여 보관하다가 해방 후 공개한 것이다. 알다시피 훈민정음은 지난 1997년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문화재로써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자원리가 밝혀진 글자로 인정받고 있다. 만약 그 당시 훈민정음 원본의 정체가 일본 당국에 알려졌더라면 분명히 불태워져 사라졌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 글이 훌륭하다는 것을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입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간송은 우리 문화를 지킨다는 생각으로 수집하였기 때문에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는 걸작 중심으로 수집하였기 때문에 그가 수집된 회화 작품을 통하지 않고서는 조선후기 회화사 연구가 불가능하다고 하니 실로 그의 문화재 수집의 의의가 어마어마 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일제시대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려 애써온 그의 노력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한 이유가 만약 일제에 적극적으로 맞섰던 독립투사와 같은 행위가 없었다는 이유라면 그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처사이다. 만약 간송의 그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앞서 언급했던 훈민정음이나 조선 후기 회사사 연구는 물론이거니와 국사책에 버젓이 등장하는 고려청자와 백자를 통한 고려시대 자기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하지 못할 것이고 이보다 더한 것은 이러한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있었다는 것 조차 모르게 될 뻔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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