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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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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동욱
댓글 0건 조회 1,016회 작성일 25-08-1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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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연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 경험의 멸종 中 -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은 현대 사회에서 경험이 어떻게 변질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책이다. 저자는 “경험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며, 그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깊이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과정을 충분히 누리기보다, 사진과 영상으로 순간을 재빨리 포착하고, 이를 공유하며 소비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나 역시 과거 여행을 하면서 순간을 기록하는 것에만 몰두하곤 했고, 그 결과 내 기억 속 장면들이 ‘느낀 장면’보다 ‘찍힌 장면’으로 더 많이 남아 있다.


  사실 나는 여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타입이 아니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들, 이를테면 항공권을 찾고, 숙소를 고르고, 동선을 계획하는 일이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막상 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몰입한다. 로젠이 말한 ‘몰입의 순간’이 비로소 내 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이번 후쿠오카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떠나기 전까지는 망설였지만,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마음은 이미 여행 모드로 바뀌었다. 


  후쿠오카에 도착한 첫날 저녁, 나는 우연히 좁은 골목길에 숨겨진 모츠나베 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고소하고 진한 육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따뜻한 증기가 얼굴을 감쌌다. 가게 안은 오래된 나무 테이블과 반짝이는 구리 냄비, 벽에 걸린 손글씨 메뉴판으로 채워져 있었다. 낯선 일본어가 오가는 가운데서도, 이상하게도 이곳의 분위기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동네 식당처럼 익숙했다. 직원들은 과할 정도로 친절했다. 문을 열자마자 큰 소리로 인사했고, 자리에 앉을 때마다 미소를 지으며 메뉴를 설명해주었다. 모츠나베가 끓기 시작하자, 직원은 국물의 상태를 몇번이나 확인하며 국자로 뒤집어주었다. 작은 배려들이 이어질수록 긴장이 풀렸고, 그 따뜻함이 국물의 온도와 겹쳐졌다. 한 숟갈 떠먹은 모츠나베는 부드러운 곱창과 신선한 야채, 깊은 맛의 육수가 조화를 이루며 속까지 데워주었다. 그 옆에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있었다. 첫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아, 이게 진짜 여행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젠이 말한 ‘순간의 완전한 소유’가 이런 것이 아닐까.


  이후에도 여행은 계속되었다. 후쿠오카의 거리는 낮과 밤이 전혀 다른 표정을 지녔다. 낮에는 정갈하고 질서 있는 골목이, 밤이 되면 붉은 등불이 켜진 포장마차 골목으로 변하며, 간판 불빛이 비집고 들어간 건물 틈새를 물들였다. 여행 중 맞이한 갑작스러운 폭우에 옷과 신발이 금세 흠뻑 젖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마저도 즐겁고 행복했다. 빗속에서 번지는 간판 불빛과 젖은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이 도시와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마저 들었다. 여행 중 작은 해프닝도 있었다. 어느 날 시내 버스를 탔는데, 하필 현금 결제만 가능한 노선이었다. 지갑에는 카드만 있었고,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부끄러운 상황마저도 재미있게 다가왔다.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이 만들어내는 감정은, 로젠이 말한 ‘비정형의 경험’이 얼마나 강하게 기억에 남는지를 증명하는 듯했다. 마지막 날, 나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선물을 골랐다. 후쿠오카 특산물, 아기자기한 소품, 함께 나누면 좋을 간식까지.『경험의 멸종』에는 “경험은 타인과 나눌 때 더욱 깊어진다”는 구절이 있다. 이번 여행에서의 선물은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라, 내가 보고 느낀 시간을 함께 나누는 방법이었다.


  책을 덮으며 깨달았다. 여행은 여전히 번거로울 수 있지만, 그 문턱을 넘으면 기록하지 않아도 오래 남는 장면들이 기다리고 있다. 모츠나베 가게의 따뜻한 국물, 빗속에서 번지는 네온사인, 버스 안의 웃긴 해프닝, 그리고 가족의 웃음 속에서 되살아날 추억은 내가 소비하지 않고 온전히 살아낸 경험의 증거다. 그리고 그 경험은 앞으로 내가 여행을 바라보는 시선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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