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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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출근하는 길에 만나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멍한 눈으로 있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보면 어느새 다가와 다리 아래에서 얼굴을 부비 적댄다. 느긋하고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사는 듯 보이는 고양이 옹. 하지만 그런 고양이가 사실은 냉철하고 지적인 제3의 인물이라면 우리의 삶은 어떤 식으로 비춰질까? 이런 생각으로 시작되는 소설이 바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언젠가 한번쯤은 읽어봐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책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고양이의 눈을 빌어 인간사의 천태만상을 그리고 있는데, 신랄한 비판과 해학, 풍자가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수작이다. 일본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불후의 명작이며 일본 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널리 읽히고 있어 일본 문학의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주인공 고양이의 눈에 비치는 인간들의 행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고양이의 주인인 ‘구샤미’는 이것저것 잡다한 예능에 손대보지만 제대로 해 내는 것은 하나도 없고, 책을 읽겠다며 서재에 틀어박혀서는 2~3페이지를 제대로 넘기지도 못하고 침을 흘리며 잠만 잔다. 구샤미의 집에 자주 찾아오는 손님 ‘메이테이’는 미학자라 하지만, 거짓을 꾸며내어 남을 골리기 좋아하고, 허풍에 변명만 잔뜩 늘어놓는 엉터리 작자다. ‘간게쓰’란 인물은 또 어떤가. 물리학자랍시고 고작 연구한다는 게 ‘목을 메어 자살하는 역학’, ‘개구리 눈알의 전동 작용에 대한 자외선의 영향’ 따위의 듣기도 읽기도 싫은 이상한 주제들뿐이다. 그런 주제에 구샤미, 메이테이, 간게쓰는 자신들을 속세에 달관한 사람들이라 지칭한다. 고양이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이렇게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고양이에게 몹시 속물적이고, 한심하게 비춰진다. 인간을 비웃는 고양이와 같은 마음으로 냉소를 보내는 나는 어느새 고양이 옆에 같이 앉아 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의 눈에 인간들은 사치스럽기 짝이 없다. 다리가 네 개나 있음에도 고작 두 개만을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불필요할 정도로 잡다하게 옷을 걸치며 살고 있다. 생존 상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저절로 두면 자라나는 머리카락에 왜 쓸데없는 궁리를 하여 갖가지 잡다한 모양새를 만든단 말인가. 먹는 것도 그렇다. 날로 먹어도 될 것을 가지고 삶고 굽고 찌는 등의 쓸데없는 수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태생이 한가한 자들이라 심심한 나머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하는 장난에 불과하다고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인간들은 툭하면 ‘바쁘다, 바빠’ 하고 떠들며 살고 있었다. 사서 고생하는 주제에 고양이인 자신을 보며 ‘너는 편해서 좋겠다.’ 따위의 부러운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인간들의 미련함을, 고양이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중간에 구샤미 선생이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여러 가지 충고를 한다. 하지만 그 내용들은 정말 가관이다. ‘돈과 다수 앞엔 무조건 복종하라’ – 가난뱅이 주제에 적극적으로 싸움을 하려고 한 것이 애당초 불평의 씨앗이니, 무조건 돈 가진 자와 겁 없는 다수에게 머리를 조아리라는 충고는 고양이에게도 비웃음을 당할 만 하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저 냉철하게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했는가?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의 횡포에 부당함을 느끼고 화도 나지만 꾹 참고 견디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 모습조차도 우리가 사는 삶의 한 방편이 되었다. 이런 부조리가 만연한 사회는 굳이 고양이의 눈을 빌리지 않아도 대부분의 인간이 느끼는 것이다. 실제로 바꾸어 보려고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지만,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 돈과 힘이 지배하는 인간들의 사회는.
이 소설의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는 고양이의 눈을 통해 인간세상의 부조리를 정확하게 짚어 내려가고 있다. 인간인 내가 봐도 소설 속에서 보여지는 우리네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굉장히 부끄러운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떠벌리며 스스로를 자화자찬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고양이의 눈에는 얼마나 한심스럽게 비춰줬을까? 우리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자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고양이의 눈을 빌어 인간사의 천태만상을 그리고 있는데, 신랄한 비판과 해학, 풍자가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수작이다. 일본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불후의 명작이며 일본 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널리 읽히고 있어 일본 문학의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주인공 고양이의 눈에 비치는 인간들의 행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고양이의 주인인 ‘구샤미’는 이것저것 잡다한 예능에 손대보지만 제대로 해 내는 것은 하나도 없고, 책을 읽겠다며 서재에 틀어박혀서는 2~3페이지를 제대로 넘기지도 못하고 침을 흘리며 잠만 잔다. 구샤미의 집에 자주 찾아오는 손님 ‘메이테이’는 미학자라 하지만, 거짓을 꾸며내어 남을 골리기 좋아하고, 허풍에 변명만 잔뜩 늘어놓는 엉터리 작자다. ‘간게쓰’란 인물은 또 어떤가. 물리학자랍시고 고작 연구한다는 게 ‘목을 메어 자살하는 역학’, ‘개구리 눈알의 전동 작용에 대한 자외선의 영향’ 따위의 듣기도 읽기도 싫은 이상한 주제들뿐이다. 그런 주제에 구샤미, 메이테이, 간게쓰는 자신들을 속세에 달관한 사람들이라 지칭한다. 고양이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이렇게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고양이에게 몹시 속물적이고, 한심하게 비춰진다. 인간을 비웃는 고양이와 같은 마음으로 냉소를 보내는 나는 어느새 고양이 옆에 같이 앉아 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의 눈에 인간들은 사치스럽기 짝이 없다. 다리가 네 개나 있음에도 고작 두 개만을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불필요할 정도로 잡다하게 옷을 걸치며 살고 있다. 생존 상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저절로 두면 자라나는 머리카락에 왜 쓸데없는 궁리를 하여 갖가지 잡다한 모양새를 만든단 말인가. 먹는 것도 그렇다. 날로 먹어도 될 것을 가지고 삶고 굽고 찌는 등의 쓸데없는 수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태생이 한가한 자들이라 심심한 나머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하는 장난에 불과하다고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인간들은 툭하면 ‘바쁘다, 바빠’ 하고 떠들며 살고 있었다. 사서 고생하는 주제에 고양이인 자신을 보며 ‘너는 편해서 좋겠다.’ 따위의 부러운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인간들의 미련함을, 고양이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중간에 구샤미 선생이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여러 가지 충고를 한다. 하지만 그 내용들은 정말 가관이다. ‘돈과 다수 앞엔 무조건 복종하라’ – 가난뱅이 주제에 적극적으로 싸움을 하려고 한 것이 애당초 불평의 씨앗이니, 무조건 돈 가진 자와 겁 없는 다수에게 머리를 조아리라는 충고는 고양이에게도 비웃음을 당할 만 하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저 냉철하게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했는가?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의 횡포에 부당함을 느끼고 화도 나지만 꾹 참고 견디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 모습조차도 우리가 사는 삶의 한 방편이 되었다. 이런 부조리가 만연한 사회는 굳이 고양이의 눈을 빌리지 않아도 대부분의 인간이 느끼는 것이다. 실제로 바꾸어 보려고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지만,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 돈과 힘이 지배하는 인간들의 사회는.
이 소설의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는 고양이의 눈을 통해 인간세상의 부조리를 정확하게 짚어 내려가고 있다. 인간인 내가 봐도 소설 속에서 보여지는 우리네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굉장히 부끄러운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떠벌리며 스스로를 자화자찬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고양이의 눈에는 얼마나 한심스럽게 비춰줬을까? 우리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자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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