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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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평전
2009년 2월 어느날, 수많은 인파가 하나의 마음으로 명동성당으로 향했고, 그 발길은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에는 직장으로 향하던 회사원들과 교복 입은 학생들이 주를 이루었고, 다리를 절거나 휠체어에 앉은 사람처럼 몸이 불편한 이들의 모습도 많았다. 다운증후증을 앓고 있는 아들을 둔 한 어머니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기 직전 남기신 “고맙다”라는 한마디가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로서 인간애와 겸손함으로 낮은 곳의 사람들을 보듬던 삶을 사셨던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그렇게 수많은 인파들의 진정어린 추모와 함께 전혀 외롭지 않아 보였다. 나는 평소에 언론매체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행보를 접할 때마다 속으로 조용하게 존경심을 표현하곤 하였다. 그래서 언젠가 그 분의 삶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고인이 되시어, 평전을 통해서 그분의 삶을 알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김수환 추기경을 처음 신부의 길로 인도한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옹기를 팔며 떠돌이 생활을 했던 그의 부친은 가난한 삶을 선택할지라도 천주교를 버릴 수 없었다. 부친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어렵게 생계를 꾸려날 무렵, “신부가 되라”는 어머니의뜻에 따라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딱딱하고 재미없게만 보이는 사제의 길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예쁜 아내와 함께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게 꿈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는 신부가 되기 싫었다고 한다. 만일 김수환 추기경이 어릴 적에 연애를 많이 하셨더라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었겠다. 어린 마음에 신부가 되기 싫어 꾀도 많이 부렸지만 결국 신부의 길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선택받은 길이란 것을 깨닫고 신학교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신부가 되기까지 그의 의지 보다는 선택받았다는 사명감이 컸고, 이후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서울대교구장을 거쳐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이 되기까지, 모두 예기치 않았던, 그가 느끼기에 너무 무겁고 막중한 축복이었다. 특히, 그가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꼭 15년 이 된 1969년,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바오로 6세의 집전으로 김수환 추기경의 서임식이 거행되었다. 세계 136명의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였으며, 아시아에서는 중국에 이어 다섯 번 째 추기경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선 최초였다. 교황청은 광복 당시부터 유엔보다 앞서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파송없이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 천주교의 수난사를 주목했다. 그러한 천주교의 큰 물줄기에서 제 2차 바티칸공회의 정신을 꿰뚫고 있는 이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독일 유학 당시 이러한 시대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했고, 교회는 세상의 일부이며 세상 안에 있고, 세상을 향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마산교구장 출신의 풋내기 주교를 서울대교구장으로 발탁하고 나아가 일 년 만에 세계 최연소 추기경으로 파격 임명한 교황청의 뜻이 아닐까.
그는 추기경이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교황청으로부터 매우 높게 인정 받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리고 내심 이제 도망갈 길이 완전히 막혀 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우스운 얘기지만, 주교로 서품될 때도 주교 서품식 전례서 끝장에 나와 있는 주교직위 박탈사유와 절차를 유심히 읽어 보면서 도망갈 궁리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이 추기경으로 까지 임명된 것은, 잘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더욱 더 큰 사랑을 베풀고 , 정의롭게 살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들였다. 그는 세상 속에 나와 있는 교회를 몸소 실천하였다. 항상 가난과 불의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도왔고, 그들의 교통을 함께 느끼면서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함께 옆에 있어 주었다. 추기경으로서 비서신부를 두고, 다른이가 해주는 밥을 편하게 먹으며, 자유롭게 이곳 저 곳을 다닐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또한 거대 권력 앞에서 핍박받고 소외된 계층을 돌보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 시절, 성탄 자정 미사가 전국에 중계 되던 날, 예수성탄대축일 전야에는 으레 자정미사를 전국에 생중계 하곤 했는데 이때 강론대에 선 김수환 추기경은 직접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 기도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때마침 이 방송을 보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즉각 방송중지 명령을 내렸으며, 이후 천주교에 대한 감시와 핍박이 심해지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성서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끊임없이 사형제도를 비판하였으며, 타 종교와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종교간의 모든 차별을 넘어 전 인류가 하나의 형제가 되는것, 그것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라고 여겼다. 김수환 추기경이 본교롭게도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성균관 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의 심산상을 수여하게 되어, 수상자의 관례로서 묘소를 참배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각종 언론들은 추기경이 유학자의 무덤에 절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김수환 추기경은 거리낌 없이 절을 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여섯 번이나 무릎을 꿇고 묘소에 술도 한잔 따라 올렸다. 그는 심산선생에게 하나님의 안식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절을 올렸다고 말하며, 훌륭하게 살다가신 분에게 격식을 차리는 것에 있어서 종교적 장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국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로서 인간애와 겸손함으로 억눌린 민초를 보듬던 삶을 사셨던 김수환 추기경. 항상 자신에게 추기경이라는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칭송보다는 혜화동 할아버지라고 불리기 바랄 정도로 낮은 삶을 사셨던 그는 선종하기 2~3일 전부터 그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라고 전했다고 한다. 결국 이 말 한마디가 그분의 유언이 되었지만, 무엇 보다고 그분의 삶을 잘 말해주는 한마디가 아닐까.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던 날, 예수가 침을 발라 눈먼 사람의 두 눈을 뜨게 했다는 복음 처럼 두 사람이 그들의 인생에 새로이 빛을 얻게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각막 기증으로 19살에 과일을 따다 나뭇가지에 오른쪽 눈을 찔려 완전히 시력을 상실한 할머니와, 30여 년 전 다니던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왼쪽 시력을 잃은 할아버지가 새롭게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추기경의 안구를 감히 적출 할 수 있느냐는 의견이 많아서 의료진들과 천주교인들의 반대가 심하였지만, 평생을 낮은 곳에서 소외 받은 이들을 위한 삶을 사셨던 김수환 추기경의 뜻을 존중하기로 하여 각막을 기증 한 것이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실천하는 종교인의 삶을 사셨던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는 자연스럽게 국민장이 되었다. 수많은 국민들의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처음 신부가 되기로 하셨을 때, 결혼을 하지 못해 가정을 못 가진다는 것에 허탈 하셨다는 김수환 추기경은 이렇듯 수만명의 자식을 두셨으니 하늘에서는 아마 매우 뿌듯해 하시지 않을까. 항상 사랑이라는 용어를 강조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서로 사랑했느냐” 하는 것이 하느님의 최후 심판의 기준이라고 하셨던 김수환 추기경은 아마도 천국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내실 거라고 믿는다.
2009년 2월 어느날, 수많은 인파가 하나의 마음으로 명동성당으로 향했고, 그 발길은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에는 직장으로 향하던 회사원들과 교복 입은 학생들이 주를 이루었고, 다리를 절거나 휠체어에 앉은 사람처럼 몸이 불편한 이들의 모습도 많았다. 다운증후증을 앓고 있는 아들을 둔 한 어머니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기 직전 남기신 “고맙다”라는 한마디가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로서 인간애와 겸손함으로 낮은 곳의 사람들을 보듬던 삶을 사셨던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그렇게 수많은 인파들의 진정어린 추모와 함께 전혀 외롭지 않아 보였다. 나는 평소에 언론매체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행보를 접할 때마다 속으로 조용하게 존경심을 표현하곤 하였다. 그래서 언젠가 그 분의 삶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고인이 되시어, 평전을 통해서 그분의 삶을 알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김수환 추기경을 처음 신부의 길로 인도한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옹기를 팔며 떠돌이 생활을 했던 그의 부친은 가난한 삶을 선택할지라도 천주교를 버릴 수 없었다. 부친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어렵게 생계를 꾸려날 무렵, “신부가 되라”는 어머니의뜻에 따라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딱딱하고 재미없게만 보이는 사제의 길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예쁜 아내와 함께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게 꿈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는 신부가 되기 싫었다고 한다. 만일 김수환 추기경이 어릴 적에 연애를 많이 하셨더라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었겠다. 어린 마음에 신부가 되기 싫어 꾀도 많이 부렸지만 결국 신부의 길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선택받은 길이란 것을 깨닫고 신학교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신부가 되기까지 그의 의지 보다는 선택받았다는 사명감이 컸고, 이후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서울대교구장을 거쳐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이 되기까지, 모두 예기치 않았던, 그가 느끼기에 너무 무겁고 막중한 축복이었다. 특히, 그가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꼭 15년 이 된 1969년,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바오로 6세의 집전으로 김수환 추기경의 서임식이 거행되었다. 세계 136명의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였으며, 아시아에서는 중국에 이어 다섯 번 째 추기경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선 최초였다. 교황청은 광복 당시부터 유엔보다 앞서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파송없이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 천주교의 수난사를 주목했다. 그러한 천주교의 큰 물줄기에서 제 2차 바티칸공회의 정신을 꿰뚫고 있는 이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독일 유학 당시 이러한 시대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했고, 교회는 세상의 일부이며 세상 안에 있고, 세상을 향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마산교구장 출신의 풋내기 주교를 서울대교구장으로 발탁하고 나아가 일 년 만에 세계 최연소 추기경으로 파격 임명한 교황청의 뜻이 아닐까.
그는 추기경이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교황청으로부터 매우 높게 인정 받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리고 내심 이제 도망갈 길이 완전히 막혀 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우스운 얘기지만, 주교로 서품될 때도 주교 서품식 전례서 끝장에 나와 있는 주교직위 박탈사유와 절차를 유심히 읽어 보면서 도망갈 궁리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이 추기경으로 까지 임명된 것은, 잘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더욱 더 큰 사랑을 베풀고 , 정의롭게 살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들였다. 그는 세상 속에 나와 있는 교회를 몸소 실천하였다. 항상 가난과 불의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도왔고, 그들의 교통을 함께 느끼면서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함께 옆에 있어 주었다. 추기경으로서 비서신부를 두고, 다른이가 해주는 밥을 편하게 먹으며, 자유롭게 이곳 저 곳을 다닐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또한 거대 권력 앞에서 핍박받고 소외된 계층을 돌보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 시절, 성탄 자정 미사가 전국에 중계 되던 날, 예수성탄대축일 전야에는 으레 자정미사를 전국에 생중계 하곤 했는데 이때 강론대에 선 김수환 추기경은 직접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 기도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때마침 이 방송을 보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즉각 방송중지 명령을 내렸으며, 이후 천주교에 대한 감시와 핍박이 심해지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성서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끊임없이 사형제도를 비판하였으며, 타 종교와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종교간의 모든 차별을 넘어 전 인류가 하나의 형제가 되는것, 그것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라고 여겼다. 김수환 추기경이 본교롭게도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성균관 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의 심산상을 수여하게 되어, 수상자의 관례로서 묘소를 참배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각종 언론들은 추기경이 유학자의 무덤에 절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김수환 추기경은 거리낌 없이 절을 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여섯 번이나 무릎을 꿇고 묘소에 술도 한잔 따라 올렸다. 그는 심산선생에게 하나님의 안식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절을 올렸다고 말하며, 훌륭하게 살다가신 분에게 격식을 차리는 것에 있어서 종교적 장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국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로서 인간애와 겸손함으로 억눌린 민초를 보듬던 삶을 사셨던 김수환 추기경. 항상 자신에게 추기경이라는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칭송보다는 혜화동 할아버지라고 불리기 바랄 정도로 낮은 삶을 사셨던 그는 선종하기 2~3일 전부터 그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라고 전했다고 한다. 결국 이 말 한마디가 그분의 유언이 되었지만, 무엇 보다고 그분의 삶을 잘 말해주는 한마디가 아닐까.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던 날, 예수가 침을 발라 눈먼 사람의 두 눈을 뜨게 했다는 복음 처럼 두 사람이 그들의 인생에 새로이 빛을 얻게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각막 기증으로 19살에 과일을 따다 나뭇가지에 오른쪽 눈을 찔려 완전히 시력을 상실한 할머니와, 30여 년 전 다니던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왼쪽 시력을 잃은 할아버지가 새롭게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추기경의 안구를 감히 적출 할 수 있느냐는 의견이 많아서 의료진들과 천주교인들의 반대가 심하였지만, 평생을 낮은 곳에서 소외 받은 이들을 위한 삶을 사셨던 김수환 추기경의 뜻을 존중하기로 하여 각막을 기증 한 것이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실천하는 종교인의 삶을 사셨던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는 자연스럽게 국민장이 되었다. 수많은 국민들의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처음 신부가 되기로 하셨을 때, 결혼을 하지 못해 가정을 못 가진다는 것에 허탈 하셨다는 김수환 추기경은 이렇듯 수만명의 자식을 두셨으니 하늘에서는 아마 매우 뿌듯해 하시지 않을까. 항상 사랑이라는 용어를 강조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서로 사랑했느냐” 하는 것이 하느님의 최후 심판의 기준이라고 하셨던 김수환 추기경은 아마도 천국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내실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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