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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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전거 도둑>은 살아남은 자들을 통해 전쟁 후의 아픔을 그려내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피와 죽은 자들을 통해 전쟁의 추악함과 아픔을 보여주는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자전거 도둑>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조명하며 전쟁 장면이 하나도 나오지 않고도 전쟁 후의 아픔을 그려내었다.
나는 영화를 본 뒤 흥미를 느껴 소설 <자전거 도둑> 또한 읽게 되었다. 소설 <자전거 도둑> 역시 살아남은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를 그린다는 점에서 영화와 겹쳐진다. 김승호나 서미혜는 저마다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있고 그것에 대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소설은 독자적인 것으로 영화는 소설의 촉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자전거를 훔쳐 타는 서미혜에서 김승호의 영화 <자전거 도둑>으로 발전된다. 그리고 영화는 김승호의 ‘가난한 가계의 무력한 아버지’, ‘아들 앞에서 봉변을 당하는 아버지’와 서미혜의 ‘자전거를 품치는 도둑’과 ‘간질환자인 오빠’를 떠올리게 하며 두 사람의 과거로 파고든다. 즉 1930년대의 영화는 현재로 이어지고, 소설은 현재에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화자인 김승화의 상처를 깊게 느끼게 되었다. 김승호의 상처는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부터 비롯되고 그것은 영화 <자전거 도둑>의 아버지와 브루노와 같은 모습이라 생각한다. 영화 <자전거 도둑>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로마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들 브루노가 나온다. 역사와 국가는 이념과 명분을 위해 전쟁을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끼니와 가족의 생계가 이념이며 명분이고, 오히려 그것보다 소중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오랫동안 실업 상태로 있던 아버지는 포스터를 붙이는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이 일자리의 조건은 자전거였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에게 임금이란 주급이든 월급이든 그 기간만큼의 생계이며 행복이며 꼭 그 기간만큼의 계획 가능한 미래이다. 즉, 브루노 가족에게 자전거는 생계이자, 행복이며 미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전거를 잃어버리게 되면서 아버지와 브루노에게도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아버지도 영화 속 아버지와 다를 것 없이 가난하고 몸까지 불편하다. 구멍가게를 하면서 생계를 꾸리던 아버지는 어린 화자가 미키대장군 카라멜을 먹은 것에 불같이 화를 낸다. 아버지는 곧 남은 카라멜을 화자에게 내주지만 화자는 카라멜이 녹도록 그것을 먹지 않는다. 이처럼 어린 아들과 아버지는 완전한 합일점을 찾지 못한 갈등상태이다. 그러던 두 사람은 어느 날 소주 스무 병중에 두 병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
영화 <자전거 도둑>의 희망이 자전거에 달렸다면 소설 속 어린 화자와 아버지에게는 혹부리 영감 집에 두고 온 소주 두 병이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아버지는 혹부리 영감 몰래 소주 두 병을 훔치게 되지만 곧 발각되고 혹부리 영감은 어린 아들을 호되게 가르치라고 한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후려치며 혹부리 영감이라는 권력에 복종하지만 그것이 가족 때문이라는 것을 어린 ‘나’ 역시 알고 있으므로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며 아버지의 괴어 있는 눈물을 투시한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아니므로 더욱 자유로우며 복수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애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라는 끔찍한 다짐을 한다.
그런가하면 서미혜의 상처는 영화 속 간질 환자로 인해 과거로 파고든다. 두 사람은 모 두 영화 <자전거 도둑>에 얽힌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김승호의 상처는 서미혜의 상처와는 다르다. 김승호가 가난에 연유한 상처를 지녔다면 서미혜의 상처는 가족사에 연유하는 것으로 자신 때문에 죽게 된 대상이 오빠라는 점에서 김승호의 상처와 깊이나 방향을 달리하는것 같았다. 김승호의 상처는 부끄럽지만 가여운 아버지에 의한 것이며 그래서 어린 시절 분탕질로 죽은 혹부리 영감에 대한 죄책감은 없다. 오히려 김승호의 상처는 혹부리 영감에게 복수를 하면서 해소되는 것 같았다. 김승호는 비록 발렌타인 십칠 년짜리 병목을 휘어 잡으면서 비디오를 볼망정 <자전거 도둑>을 보면서 상처를 비록 직시한다. 그것은 비록 흉터로 남아 없어지지 않지만 병은 아니므로 김승호의 상처는 서미혜의 그것보다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서미혜가 가진 과거의 상처는 현재의 서미혜에게 억압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보상, 복구가 불가능한 기억이고, 사건이므로 이것을 치유하고 속죄하는 데는 최초의 간질발작이 있었던 지점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미혜는 계속해서 자전거를 훔친다. 결국 서미혜의 자전거를 훔치는 행위는 오빠의 죽음에 대한 속죄 의식이며 과거의 상처를 타인과의 관계로 치유하려는 나약한 모습인 것이다. 자전거의 열쇠가, 다락방의 열쇠가 그녀에게 있듯이 기억의 열쇠는 그녀가 쥐고 있다. 그러나 김승호 역시 자신의 상처에 함몰되어 있기에 함정에 빠지는 것 같다며 서미혜로부터 빠져나온다. 두 사람 모두 상처를 가진 인물들이지만 서로의 상처를 보듬기에는 자신들의 상처가 너무 버겁다. 치유되지 못한 이들은 여전히 <자전거 도둑>을 돌려보고, 남의 자전거를 훔쳐 탈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본 뒤 흥미를 느껴 소설 <자전거 도둑> 또한 읽게 되었다. 소설 <자전거 도둑> 역시 살아남은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를 그린다는 점에서 영화와 겹쳐진다. 김승호나 서미혜는 저마다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있고 그것에 대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소설은 독자적인 것으로 영화는 소설의 촉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자전거를 훔쳐 타는 서미혜에서 김승호의 영화 <자전거 도둑>으로 발전된다. 그리고 영화는 김승호의 ‘가난한 가계의 무력한 아버지’, ‘아들 앞에서 봉변을 당하는 아버지’와 서미혜의 ‘자전거를 품치는 도둑’과 ‘간질환자인 오빠’를 떠올리게 하며 두 사람의 과거로 파고든다. 즉 1930년대의 영화는 현재로 이어지고, 소설은 현재에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화자인 김승화의 상처를 깊게 느끼게 되었다. 김승호의 상처는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부터 비롯되고 그것은 영화 <자전거 도둑>의 아버지와 브루노와 같은 모습이라 생각한다. 영화 <자전거 도둑>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로마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들 브루노가 나온다. 역사와 국가는 이념과 명분을 위해 전쟁을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끼니와 가족의 생계가 이념이며 명분이고, 오히려 그것보다 소중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오랫동안 실업 상태로 있던 아버지는 포스터를 붙이는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이 일자리의 조건은 자전거였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에게 임금이란 주급이든 월급이든 그 기간만큼의 생계이며 행복이며 꼭 그 기간만큼의 계획 가능한 미래이다. 즉, 브루노 가족에게 자전거는 생계이자, 행복이며 미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전거를 잃어버리게 되면서 아버지와 브루노에게도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아버지도 영화 속 아버지와 다를 것 없이 가난하고 몸까지 불편하다. 구멍가게를 하면서 생계를 꾸리던 아버지는 어린 화자가 미키대장군 카라멜을 먹은 것에 불같이 화를 낸다. 아버지는 곧 남은 카라멜을 화자에게 내주지만 화자는 카라멜이 녹도록 그것을 먹지 않는다. 이처럼 어린 아들과 아버지는 완전한 합일점을 찾지 못한 갈등상태이다. 그러던 두 사람은 어느 날 소주 스무 병중에 두 병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
영화 <자전거 도둑>의 희망이 자전거에 달렸다면 소설 속 어린 화자와 아버지에게는 혹부리 영감 집에 두고 온 소주 두 병이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아버지는 혹부리 영감 몰래 소주 두 병을 훔치게 되지만 곧 발각되고 혹부리 영감은 어린 아들을 호되게 가르치라고 한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후려치며 혹부리 영감이라는 권력에 복종하지만 그것이 가족 때문이라는 것을 어린 ‘나’ 역시 알고 있으므로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며 아버지의 괴어 있는 눈물을 투시한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아니므로 더욱 자유로우며 복수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애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라는 끔찍한 다짐을 한다.
그런가하면 서미혜의 상처는 영화 속 간질 환자로 인해 과거로 파고든다. 두 사람은 모 두 영화 <자전거 도둑>에 얽힌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김승호의 상처는 서미혜의 상처와는 다르다. 김승호가 가난에 연유한 상처를 지녔다면 서미혜의 상처는 가족사에 연유하는 것으로 자신 때문에 죽게 된 대상이 오빠라는 점에서 김승호의 상처와 깊이나 방향을 달리하는것 같았다. 김승호의 상처는 부끄럽지만 가여운 아버지에 의한 것이며 그래서 어린 시절 분탕질로 죽은 혹부리 영감에 대한 죄책감은 없다. 오히려 김승호의 상처는 혹부리 영감에게 복수를 하면서 해소되는 것 같았다. 김승호는 비록 발렌타인 십칠 년짜리 병목을 휘어 잡으면서 비디오를 볼망정 <자전거 도둑>을 보면서 상처를 비록 직시한다. 그것은 비록 흉터로 남아 없어지지 않지만 병은 아니므로 김승호의 상처는 서미혜의 그것보다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서미혜가 가진 과거의 상처는 현재의 서미혜에게 억압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보상, 복구가 불가능한 기억이고, 사건이므로 이것을 치유하고 속죄하는 데는 최초의 간질발작이 있었던 지점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미혜는 계속해서 자전거를 훔친다. 결국 서미혜의 자전거를 훔치는 행위는 오빠의 죽음에 대한 속죄 의식이며 과거의 상처를 타인과의 관계로 치유하려는 나약한 모습인 것이다. 자전거의 열쇠가, 다락방의 열쇠가 그녀에게 있듯이 기억의 열쇠는 그녀가 쥐고 있다. 그러나 김승호 역시 자신의 상처에 함몰되어 있기에 함정에 빠지는 것 같다며 서미혜로부터 빠져나온다. 두 사람 모두 상처를 가진 인물들이지만 서로의 상처를 보듬기에는 자신들의 상처가 너무 버겁다. 치유되지 못한 이들은 여전히 <자전거 도둑>을 돌려보고, 남의 자전거를 훔쳐 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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