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과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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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와 서양사의 가장 큰 차이점 중에 하나는 자연을 바라보는 인식이라고 한다. 동양 특히 유교권 문화에서는 ‘설’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보았으며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스러움을 더 상위 가치 개념으로 여겼었다. 그래서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을 따라하려는 모습들이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활동에서 잘 나타나 있다. 반면, 서양사에서의 자연은 탐구대상이자 분석대상이었다. 동양사에서처럼 자연스러움을 경외하는 것과는 달리 왜 자연 현상은 나타나는 것이고 그것을 인간이 잘 조정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서양사에서의 목표였다. 그래서 중세시대 이후로 자연을 탐구하는 학문의 경우 서양의 기술이 동양의 그것보다 압도적으로 앞서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서양 주도의 문화가 전 세계에 퍼지면서 자연은 항상 관찰되어져 왔고 분석되어져 왔고 그래서 보다 편한 인간 생활을 위해 이용되어져 왔다. 따지고 보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연구란 것도 보다 편한 인간 생활을 위해 눈에도 보이지 않는 나노미터급 자연 세계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통제하려고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행동에는 문제가 없을까? 테크놀로지 발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에 대한 부작용은 없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강한 어조로 “예”라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알게 모르게 이미 부작용을 겪어왔거나 어느 정도 예측되어지기 때문이리라.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세상 끝과의 조우”에서 감독은 남극에서 탐험하고 있는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생활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문명에 물들여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남극에서는 인류의 역사 연구나 단세포 생물 연구와 같은 중요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연구를 통해 다른 여타의 곳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를 관찰 및 분석하고 있다. 사실, 이들의 행위 그 자체 또는 그 행위로 인한 자연의 훼손 정도를 살펴본다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남극에서 생활을 한 연구자들일경우 특히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깊어 혹시 모를 훼손에 대해서도 염려하고 있고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 중 일부는 현재의 연구 형태에 대해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다. 불과 100년전만 하더라도 남극은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였고 그 어느 누구도 남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문센 과 같은 탐험가들에 의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남극의 문은 문명의 이기의 발전과 더불어 빠르게 진행되어왔다. 현지 연구자들이 걱정하는 점이라면, 아문센 과 같은 탐험가들의 경우 말 그래도 미지의 셰게를 향한 모험심과 조국의 명예에 대한 사명감으로 일을 하였지만, 현재에는 오로지 지식의 축적이나 혹은 획득한 지식을 이용한 인간 생활의 향상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결국은 자본주의 논리에 순응하여 ‘돈’이 되는 연구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문명의 발전은 분명 인간 생활을 윤택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선택받지 못한 문명의 경우 도태되어 역사에서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인류는 자연을 한낯 도구의 대상으로 밖에 인식하지 않을 것이고 인간 생활에 필요한 자원들을 다 써버리게 되는 그 날이 인류 역사의 종말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전에 우주로 진출하지 못한다면..) 인류가 지난 2000여년 동안 살아왔지만 자연을 제대로 이용한지는 불과 400여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류 역사의 종말점이 얼마 남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비극적 종말을 앞당기지 않도록 평소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다.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세상 끝과의 조우”에서 감독은 남극에서 탐험하고 있는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생활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문명에 물들여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남극에서는 인류의 역사 연구나 단세포 생물 연구와 같은 중요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연구를 통해 다른 여타의 곳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를 관찰 및 분석하고 있다. 사실, 이들의 행위 그 자체 또는 그 행위로 인한 자연의 훼손 정도를 살펴본다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남극에서 생활을 한 연구자들일경우 특히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깊어 혹시 모를 훼손에 대해서도 염려하고 있고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 중 일부는 현재의 연구 형태에 대해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다. 불과 100년전만 하더라도 남극은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였고 그 어느 누구도 남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문센 과 같은 탐험가들에 의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남극의 문은 문명의 이기의 발전과 더불어 빠르게 진행되어왔다. 현지 연구자들이 걱정하는 점이라면, 아문센 과 같은 탐험가들의 경우 말 그래도 미지의 셰게를 향한 모험심과 조국의 명예에 대한 사명감으로 일을 하였지만, 현재에는 오로지 지식의 축적이나 혹은 획득한 지식을 이용한 인간 생활의 향상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결국은 자본주의 논리에 순응하여 ‘돈’이 되는 연구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문명의 발전은 분명 인간 생활을 윤택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선택받지 못한 문명의 경우 도태되어 역사에서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인류는 자연을 한낯 도구의 대상으로 밖에 인식하지 않을 것이고 인간 생활에 필요한 자원들을 다 써버리게 되는 그 날이 인류 역사의 종말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전에 우주로 진출하지 못한다면..) 인류가 지난 2000여년 동안 살아왔지만 자연을 제대로 이용한지는 불과 400여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류 역사의 종말점이 얼마 남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비극적 종말을 앞당기지 않도록 평소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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