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여자, 정혜 - 이제 그녀는 사랑을 할 준비가 되었을까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송승민
댓글 0건 조회 6,282회 작성일 10-10-15 22:18

본문

여자 정혜


한 사람에게 닥친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그 사람의 인생이 통째로 흔들릴 수 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들로 인해 때로는 우리들의 삶에 크고 작은 트라우마가 남게 되는데,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 속에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동안 그러한 면들이 드러나게 된다.

처음 해 봤을 때 어땠어?/…해보다니 뭘…?/섹스말야, 섹스/ ? /너 처음 섹스 했을 때. 남자하고 처음. 기분이 어땠어?/뭘 그런 걸 갑자기…/ (중략) /그냥… 아팠어요.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서 그의 외모나 행동 거지로부터 그 사람의 특징을 끄집어내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게 이성적으로는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라는 것이 그 사람과 가까워지기 전에는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우리 나름대로의 기준을 들이대어 분석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마치 옛날 동굴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겉모습만으로도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했듯이. 이러한 기준들은 각자가 모두 다 경험한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천차만별이지만 암묵적으로 어느 정도의 사회적인 기준(통상적으로 상식이나 매너라고 불리우는 것)이라는 것이 있어서 첫만남에도 상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은 삼가한다. 이런 점은 비단 처음 만난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도 우리는 그의 모든 과거와 경험에 따른 그 사람의 인생관이나 행동 및 사고 방식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기준에 따른 관계를 유지하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나 행동이 될 수 있다.

‘여자, 정혜’라는 영화는 어릴 적 고모부로부터 당한 상처로 인해 평생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며 살아가는 정혜가 스스로를 위로하며 점차 변화해 가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신혼 여행,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정혜에게 호텔에 도착하자 마자 남자(신랑)는 관계를 가지려고 하지만, 정혜는 불편한 모습이 역력하다. 밤에 남자가 정혜에게 첫 경험이 어떠하였냐고 물어본다. 늦은 밤, 정혜는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른 새벽, 정혜는 짐 가방을 들고 호텔을 나선다. 그녀에게 첫 경험이 어떠했냐고 물어보는 것은 다시금 그녀의 끔찍한 예전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고문과도 같은 말일 것이다. 짧은 몇 분의 장면으로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배려하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참 후 남자가 정혜를 다시 만나 그때 왜 그랬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는 점을 보면 분명 두 사람의 관계가 그 부분에서 틀어진 것이다.

그녀가 아파트에 있을 때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밖에서 나는 소음들과 TV에서 나오는 이야기 소리, 시간 맞춰 울리는 자명종 소리 뿐이다. 영화라면 당연하게 나올만한 배경 음악 하나 없이 매우 무미 건조하며 소소한 그녀의 일상만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따분함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분위기로 전개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정혜 역할을 맡은 김지수씨는 영화의 전체적인 느낌에 비해 예쁜 외모를 가졌다고 생각되는데, ‘열세살, 수아’ 에서 수아 역을 맡은 이세영을 극에 맞게 못나도록 꾸민 것과 비교했을 때 배역을 잘못 고른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었다. 이러한 생각은 영화를 본 후 내용을 곱씹으면서 바뀌었는데, 충분히 꾸미면 아름다울 수 있는 정혜가 아픈 상처와 외로움으로 인해 스스로를 가두고 쉽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이 된다 (영화의 영어 제목이 'Charming girl'이다).

그녀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홀로 텅빈 아파트에서 혼자 밥 먹으며 지내는 정혜는 남자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홈쇼핑으로 많은 물건을 사지만, 큰 맘 먹고 직접 구두 사러 간 매장에서 남자 직원의 안내에 불쾌함을 느낀다.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대상은 그녀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말없이 자라는 화분의 나무들. 그러던 그녀는 조금씩 세상에 팔을 뻗기 시작한다. 그녀는 동네에서 가엽게 돌아다니는 새끼 고양이를 데리고 와 키운다. 하지만 녀석은 그녀가 바라는 사랑스러운 고양이가 되지 못하고 그녀를 애태우게 만든다. 그녀가 사랑을 주는 것이 어설프기도 하며 새끼 고양이 역시 사랑 받는 것이 익숙치 않다. 그녀는 망설임 끝에 자기가 일하던 우체국에 가끔씩 오는 작가(황정민)를 집에 초대하여, 그를 위해 열심히 음식을 장만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랑을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하는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고모부를 증오한다. 그녀는 그 고모부를 찾아가지만…

어릴 때의 성폭행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소재로 하는 영화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등 매우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 이 영화가 유독 나의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마치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해 가는 과정을 영화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그녀의 얼굴 표정 등을 (다른 영화에 비해서 중요하지 않은데도 너무 길다고 느낄 정도로)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촬영 기법으로 인해 관객이 그녀를 정말로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만들어준다. 이 영화에서는 너무 특별함이 없다. 심지어 그녀가 왜 작가를 집에 초대하는지에 대해 납득이 갈 만한 상황도 보여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과 상황이 평범하게만 나타난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매우 독특하며 보고 난 후에도 계속 머리 속에 남아 있게 만든다. 다시 만나게 되는 그녀와 작가, 이제 그녀는 사랑을 할 준비가 되었을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