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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이라는 제도는 과연 합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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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위주형
댓글 0건 조회 5,960회 작성일 14-04-1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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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나는 그동안 “사형”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친숙하지 않았고, 조금 이기적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나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관련되거나 나의 흥미를 충족시켜주는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사형제도에 대해 진지하고 깊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책을 통해서 나는 사형제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며, 사형제도가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제도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봉순이 언니>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 작품을 낳은 공지영 작가가 “사형”이라는 화제로 또 한번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제목만으로는 로맨틱해보이기만 한 이 책은 실제 무거움과 로맨틱함이 공존한다.

이 책은 한 사형수와 대학교수인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사형수인 27살의 남자 정윤수는 어려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세상과 인간에 대한 반감을 갖고 성장하였다. 그는 자신과 형제를 버린 어머니와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학대 속에서 자란다. 고아원에서 생활하고 앵벌이를 하며 소년 시절을 보내는 중에 동생도 객사하고, 어른이 된 후 평범한 생활을 꿈꾸었지만 결국에는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게 된다. 또 다른 주인공인 문유정은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 땐 부러울 것 하나 없지만, 유년시절의 상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15살 때, 사촌 오빠에게 강간을 당한 일이다. 그 충격에 대해 받지 못한 보상과 사랑이 이후로도 그녀를 지배하여, 세 번의 자살 미수와 여전히 죽기를 바라게 만들었다. 이 둘은 어떻게 보면 너무도 다르지만, 똑같이 살아 있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 이들이었다. 유정은 고모 모니카 수녀를 통해서 윤수를 만나게 되고, 처음에는 살인범이라는 낙인이 찍혀있는 윤수 와의 만남을 내키지 않아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 두 사람은 서로의 닮은 점들에 이끌리면서 그동안 애써 외면해 왔던 마음속의 깊은 상처를 알아보게 된다. 만남이 지속되고 그들은 서로의 상처로 다른 상처를 위로하고 다독이면서 절망은 서서히 행복감으로 바뀌어간다. 비뚤어지고 비관적이고 세 번의 자살기도까지 시도한, 본인의 말에 의하면 꼴통이었던 여자가 한 젊은 사형수를 만나면서 생의 본질을 되찾아가게 된 것이다. 유정은 스스로 죽을 결심 따위는 할 수 없게 되고, 윤수는 생애 처음으로 간절히 살고 싶어진다.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의 기쁨을 알게 해준 서로가 더 없이 소중해진다. 매일 목요일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그들 마음에 가득 차오를 무렵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윤수는 사형수였다. 내일이 곧 죽음인지도 모를, 하루하루가 소중한 그들의 만남, 목요일 오전 10부터 오후 1시까지의 짧지만 행복했던 아니 너무 짧기 때문에 더더욱 행복한 이들의 순간은 '우리들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된다. 사형수와 대학 교수. 절대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주인공을 잇는 것은 바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비참한 “과거”이다. 유정과 윤수는 상처받은 자살미수자의 모습과 사형수로서의 만남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만난다. 이 만남은 서로 응어리진 마음들을 풀어지게 하며 갈등 극복 과정을 통해서 유정과 윤수의 본연적인 존재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비참해져서 쓸모가 없어졌다고 하더라고 생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과 친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사형”이라는 단어가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형이라는 단어는 영화나 뉴스에서 다루지 않으면 그저 단순한 형벌의 하나로 취급하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은 현재도 “사형제도 존속국”이다. 대한민국에서, 현재까지 사형제도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총 902명. 사형제도가 시작된 1949년부터 1997년까지의 사형을 당한 사람의 수이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이후 1997년 12월 30일 이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사형제도 폐지국”으로 인식을 해왔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사형제도를 인정하는 “사형제도 존속국”이다. 올해 초, 헌법재판소에서 다시 한 번 대한국민은 “사형제도 존속국”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공표했다. 이를 두고, 인권단체 및 여러 네티즌들은 강력하게 항의하며 나섰다. 이들은 "사형제도는 인간의 생명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잔혹하고 비인도적이며 굴욕적인 형벌"이라며 "이러한 형벌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라며 폐지를 주장했다.

과연 사형제도는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사형수들이 죄를 저질렀지만 그들도 사람이며, 인권이 있다. 그러한 그들을 사형이라는 제도아래에서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살인자를 사형시키는 것은 피해자의 유가족을 대신해 국가가 자행하는 “보복살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죽어야 된다는 사고는 주체만 다를 뿐이지 또 다른 살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에 대한 죽음으로의 복수는 인류가 시작하면서 법이 있기 이전에 행해졌던 원시시대의 법이었다. 인류는 발전하면서 인권이라는 개념도 만들었다. 범죄인이라 하더라도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뿐더러 국가가 범죄인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면서 까지 형벌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어떤 이들은 유가족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사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형벌로써 유가족들의 깊은 상처를 씻을 수 있을까? 사형수를 죽여 버림으로써 사형수에게 무참히 죽어간 유가족들의 소중한 부모 혹은 자식의 죽음을 보상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또, 사형제도는 사람이 결정하고 집행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아무리 법관이 ‘합리적 의심 없는 고도의 개연성’에 따라 판결을 하였다 하더라도 오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생명을 박탈하는 사형은 그 위험성이 너무 크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정윤수는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사형대 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우리는 신이 아니며, 따라서 실수하기 마련이다. 만에 하나 억울한 이가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 집행 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을 때에 그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이며, 한 무고한 인간의 생명은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이기에 모두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겉으로 보이는 죄든, 그렇지 않은 죄든 말이다. 그렇다면 모니카 수녀의 말처럼 죄 많은 우리가 죽음을 통해 다른 인간을 처벌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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