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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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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준
댓글 0건 조회 1,323회 작성일 25-06-09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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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는 동안 누가 나를 기억하는가』

–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를 읽고, 나의 삶을 되짚다.



 

  나는 요즘 잠을 자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정확히 말하면, ‘잘 자고 싶다’는 갈망에 가까운 집착이다. 푹 자지 못한 날은 아침부터 나라는 존재가 흐릿하고, 뇌는 반쯤 꺼진 형광등처럼 깜빡이며 깨어 있다. 잠든 사이에도 내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내가 잠든 그 시간 동안 나의 기억은 누구에 의해 보관되고 있는가,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 중 단편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는 실존하지 않는 음반을 기억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그 음반을 갖고 있었고, 들었고, 심지어 음반 재킷의 질감까지 기억하지만, 세상 그 어디에도 그 음반은 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태도로 조용히 이야기를 마친다. 나는 이 단편을 읽으며, 내 기억도, 내 하루도, 그렇게 조용히 덮여간다는 것을 느꼈다. 잠이 들면 하루가 지워지는 느낌, 그리고 그 안에 내가 진행하고 있는 연구와 사고와 대화들도 뿌연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듯한 감각.

  그래서일까. 나에게 연구자의 삶은 자꾸만 ‘지워지는 것에 저항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실험이 진행되고, 실험 결과들이 쌓이지만, 누군가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과 다름없다. 「찰리 파커...」의 음반처럼 말이다. 이 단편을 읽으며 나는 나의 연구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것이 허상일지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기억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한 하루키의 시선은 피곤한 나에게 안심을 주었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더욱 직접적으로 내 고민을 건드렸다. 누군가의 이름을 훔치는 원숭이.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잃은 채 혼란을 겪는 사람.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타인의 인식 속에서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장치다. 가족, 연구실, 회사, 사회 속에서 나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아버지, 남편, 연구자, 학생, TL님, 동료, 아들. 그러나 요즘 나는 자주 혼란스러웠다. 어느 이름에도 온전히 나를 싣지 못하는 기분. 가족과의 시간을 가지면 연구가 멀어지고, 여유가 없어진다. 잘 자지 못하는 밤은, 이름을 여러 개 가진 내가 어느 쪽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흔들리는 밤이다.

 

  하루키의 인물들은 그런 혼란을 억지로 극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혼란을 껴안고 살아간다. 이런 자연스러운 점이 내가 하루키 글을 좋아하는 이유가 아닐까, 책을 찾아 읽을 때마다 그리고, 같은 책을 지금에 와서 다시 보아도 그 느낌이 다르다. 매번 볼 때마다 새로운 것과 다른 관점을 느끼고,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걸 보면 말이다. 원숭이에게 이름을 도둑맞은 사람은 이름을 되찾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살아간다. 하루키는 그 불완전함을 질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결핍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진실한 얼굴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잘 해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진짜 프로는 유연함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어떤 운동이든 어깨에 힘이 빠져야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자세와 좋은 결과가 얻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 온전히 몰입하고, 연구에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며,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더 깊게 잠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괜찮지 않을까. 커피를 줄여야 하는 것일까?

 

  기억은 완전하지 않고, 정체성은 불완전하며, 삶은 늘 어딘가 모자라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모자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그의 글은 설명하지 않고, 고치지 않으며,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 담백한 인정이 요즘 나에게 가장 필요한 문장이라고 느꼈다.

잠들기 전, 나는 생각한다.

오늘 하루의 나는 나인가. 아니면 타인의 기대가 만든 인형인가.

하지만 곧 하루키의 문장을 떠올린다.

“그게 허상이라도 괜찮다. 누군가의 마음에 남는다면.”

그렇게 나는 다시 눕는다.

내 기억과 내 이름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어도, 오늘의 내가 나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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