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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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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대현
댓글 0건 조회 1,199회 작성일 25-07-15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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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이 문장은 학살의 폭력이 얼마나 쉽게 인간의 삶을 끊어놓았는지를 일깨운다. 한강 작가는 제주 4.3 사건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배경으로, 학살 이후의 세월을 견디며 끝내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삶은 견고한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부서지기 쉽고, 단 한 번의 선택과 폭력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사라진 생명들이 남긴 기억의 무게를 보여준다. 단순히 죽음의 순간만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이 그 죽음을 어떻게 품고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듯 하다.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 뻔뻔스럽게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폭력은 언제나 외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관계 속에서도 더 깊이 파고든다. 위 문장은 학살이라는 집단적 폭력뿐 아니라, 그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상처를 상징하는 듯하다. 작품 속 인물들은 타인의 고통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까지 품고 살아가야 하는 복잡한 기억을 안고 있다. 결국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은 외면할 수 없는 기억과 연결되어 있나보다. 경하의 자조적인 고백은 고통의 기록이 한 번 꺼내면 다시는 덮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그 순간은 사건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의 몸과 마음에 남아 끊임없이 현재를 잠식하는 그림자가 된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가 되는 듯 하다.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작품에서 눈 내리는 풍경은 비극의 진실을 드러내는 상징과 같다. 폭설은 모든 것을 덮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리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야 비로소 진실이 드러난다. 경하가 폭설에 갇혀 인선의 집으로 향하는 길은, 망각하려는 세계와 끝내 기억해야만 하는 세계를 넘나드는 여정처럼 느껴진다.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는 장면은 바로 그 기억의 무게가 얼마나 혼란스럽고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를 잘 드러내는 것 같다. 하지만 기억을 지키는 일이 때로는 아무 성과 없이 끝나더라도, 그 노력 그 자체가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작가는 폭력 이후에도 사람이 삶을 놓지 않는 이유는 사랑에 있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끝내 기억한다는 것은 곧 끝없는 고통을 감수하는 일이다. 정심이 평생 동안 감내해야 했던 고통이 인선에게로, 그리고 다시 경하에게로 이어지는 순간, 우리는 그 기억이 얼마나 무겁고도 뜨거운지 실감할 수 있다. 사랑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늘 아플것임을 알면서도 사랑한다. 아프려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지만, 사랑하면 아프다는 것을 모두가 알면서도 뛰어든다. 이것이 지금껏 생존해온 인간 인가보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하지만 죽음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나. 뺨에 닿은 눈이 이토록 차갑게 스밀 수 있나.”
결국 이 소설은 작별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말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끝내 작별하지 못하고, 그래서 다시 기억하고, 고통 속에서도 삶을 이어간다. 죽은 자는 사라지지만, 그들의 기억과 사랑은 남은 자들의 몸과 마음으로 스며든다.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 듯 하다. 우리는 어디까지 기억하며 사랑할 용기가 있는가?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죽음은 여전히 생생하다. 눈송이처럼 차갑고도 스며드는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죽음조차 완전히 끝이 아님을 말한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망각을 선택하며, 얼마나 쉽게 ‘끝났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정말 끝난 것이 맞느냐고 작가는 묻는다. 아직 그날의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데, 우리가 그 기억 앞에서 무심할 수 있는가. 작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사랑을 택하는 일이자, 동시에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임을 알게 되어 가슴이 아린듯 하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얼마나 용기 있게 기억을 붙들 수 있을까. 누군가의 고통을 내 마음에 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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