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들, 사람의 아들 - "사람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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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 당시 아무런 의문을 품지도 않았으며, 말 그대로 신의 존재 - 하느님의 존재를 그저 있는 그대로 “교육” 받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머리가 크면서 그 동안의 무조건적인 믿음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스스로 걸어 들어간 길이 아니기에, 종교를 가지고 있음에도 늘 그 존재에 대한 의문은 머리 속 한 쪽 구석에 남겨져 있었으며, 그러한 내게 “사람의 아들”은 이에 관한 문제를 다시금 생각해 볼 기회를 준 셈이다.
허나 하느님을 믿는 천주교 신자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면 욕을 먹어도 싸다. 냉소적인 태도 역시 환영할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 내가 이야기 하려는 건 그와 같은 고답적 결론이 아니다. 모두가 Yes라고 할 때, 혼자 No라고 외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새로운 고찰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사람의 아들”에는 건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하스 페르츠가 자기 민족의 신(야훼)에 대해 실망하고 새로운 신을 찾아 헤매는 과정을 그린다. 신의 아들로 대변되는 예수와는 달리 사람의 아들로 대변되는 아하스 페르츠. 그가 야훼의 존재에 실망을 하게 된 이유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종교인의 관점에서 벗어난 제 3의 시점에서 한번쯤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의지를 넘을 수 없다면, 피조물이 가진 악의는 누구에게서 나온 것 인가.
창조주의 자비와 사랑은 왜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게는 닿지 않는가.
믿지 않는 자에게 영원한 고통을 약속하는 편협한 창조주가 과연 옳은가.
정말로 창조주라는 존재가 있는가.
이 외에도 정말 많은 의문점들이 제기된다. 소설 속의 주인공 아하스 페르츠가 느끼는 고뇌는 “사람의 아들”이기에 할 수 있는 인간적인 것들이라 생각된다. 어느 문제 하나도 결코 가볍지 않으며,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가진 자들 사이에 타협 또한 어려운 것들이다. 허나 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는 입장에서 이에 대한 견해를 내놓는 것이 의미 없는 행위는 아닐 것이다.
성경으로 잘 알려진 아담과 이브의 원죄는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은 죄이다. 야훼가 허락하지 않는 행위를 한 죄로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창조주의 의지 하에 있는 피조물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애초에 창조주가 그 행위를 허락했음이 아닌가?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애매한 자유” 를 선사하였으며, 나약한 인간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무거운 짐조차 떠 안겼다.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과 자애로 바라봤더라면 그래서는 안됐을 것이다.
또 내가 창조주의 이중적인 행동에 의심을 품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도 굶어 죽어가는 난민들의 연민에서다. 그들이 기아와 병마에 고통 받다 죽는 것에 창조주의 자애가 섞여 있다고 나는 생각할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죄를 안고 태어났기에 그러한 업이 그들을 따라 다닌다는 것 인가. 나아가 선악에 관계없이 왜, 그토록 사랑하는 피조물에게 고통을 겪게 하는지 이해 할 수 없다. 간혹 그들에게 육신의 고통은 한 순간이며, 사후의 행복한 삶은 영원하고 말하는 이가 있다. 그러한 말씀뿐인 전파가 정녕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삶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생각되는 것은 신(창조주)의 존재여부에 대한 사실이다. 논리와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도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 실체에 대한 의문은 누구나 한번쯤 의심해보지 않을까 싶다. 불행하게도 나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을 알지 못하며, 증명을 한 예 또한 알지 못하기에 실체로서의 신은 없다고 생각한다. 허나 개념으로서의 신은 있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닥치면 초월적인 누군가를 찾게 되며, 그 존재를 사람들은 신이라 부른다. 여기서 신의 존재 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바로, 신은 나약한 인간이 기대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긴 가상의 존재라는 이야기다. 분명 우리는 신을 통해서 마음의 안식을 얻고 자신을 추스를 수 있지만, 그 존재가 실존하는가 와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해석과 더불어 종교라는 것이 그러한 가상의 존재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체화 할 수 있게끔 체계적으로 만든 일종의 도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현대의 방대한 지식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마 신이 실제로 존재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질서 속에서의 불안보다 기댈 존재의 위로와 희망이 더 나은 것이기에 그렇게 여러 규범과 의식으로 포장된 “믿기 위한 미신”을 만들어 스스로를 자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내가 하찮은 인간의 단순하고 짧은 지식으로 감히 신을 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성적으로는 실체로서의 신을 부정하면서도, 내 마음 어느 한쪽 구석에서는 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 할 뿐이다.
참조
아하스 페르츠 :
전설상의 인물<외경(外經)에 등장한다 함>로써 유대에 살던 재봉사였는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하스 페르츠의 집 앞에서 기진하여 쓰러지게 되자 그에게 잠시 쉬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는데 그는 이를 매몰차게 거절하였다 한다. 그런 아하스 페르츠에게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재림할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저주를 내리게 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아하스 페르츠는 아직도 살아서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한다.
허나 하느님을 믿는 천주교 신자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면 욕을 먹어도 싸다. 냉소적인 태도 역시 환영할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 내가 이야기 하려는 건 그와 같은 고답적 결론이 아니다. 모두가 Yes라고 할 때, 혼자 No라고 외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새로운 고찰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사람의 아들”에는 건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하스 페르츠가 자기 민족의 신(야훼)에 대해 실망하고 새로운 신을 찾아 헤매는 과정을 그린다. 신의 아들로 대변되는 예수와는 달리 사람의 아들로 대변되는 아하스 페르츠. 그가 야훼의 존재에 실망을 하게 된 이유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종교인의 관점에서 벗어난 제 3의 시점에서 한번쯤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의지를 넘을 수 없다면, 피조물이 가진 악의는 누구에게서 나온 것 인가.
창조주의 자비와 사랑은 왜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게는 닿지 않는가.
믿지 않는 자에게 영원한 고통을 약속하는 편협한 창조주가 과연 옳은가.
정말로 창조주라는 존재가 있는가.
이 외에도 정말 많은 의문점들이 제기된다. 소설 속의 주인공 아하스 페르츠가 느끼는 고뇌는 “사람의 아들”이기에 할 수 있는 인간적인 것들이라 생각된다. 어느 문제 하나도 결코 가볍지 않으며,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가진 자들 사이에 타협 또한 어려운 것들이다. 허나 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는 입장에서 이에 대한 견해를 내놓는 것이 의미 없는 행위는 아닐 것이다.
성경으로 잘 알려진 아담과 이브의 원죄는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은 죄이다. 야훼가 허락하지 않는 행위를 한 죄로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창조주의 의지 하에 있는 피조물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애초에 창조주가 그 행위를 허락했음이 아닌가?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애매한 자유” 를 선사하였으며, 나약한 인간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무거운 짐조차 떠 안겼다.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과 자애로 바라봤더라면 그래서는 안됐을 것이다.
또 내가 창조주의 이중적인 행동에 의심을 품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도 굶어 죽어가는 난민들의 연민에서다. 그들이 기아와 병마에 고통 받다 죽는 것에 창조주의 자애가 섞여 있다고 나는 생각할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죄를 안고 태어났기에 그러한 업이 그들을 따라 다닌다는 것 인가. 나아가 선악에 관계없이 왜, 그토록 사랑하는 피조물에게 고통을 겪게 하는지 이해 할 수 없다. 간혹 그들에게 육신의 고통은 한 순간이며, 사후의 행복한 삶은 영원하고 말하는 이가 있다. 그러한 말씀뿐인 전파가 정녕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삶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생각되는 것은 신(창조주)의 존재여부에 대한 사실이다. 논리와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도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 실체에 대한 의문은 누구나 한번쯤 의심해보지 않을까 싶다. 불행하게도 나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을 알지 못하며, 증명을 한 예 또한 알지 못하기에 실체로서의 신은 없다고 생각한다. 허나 개념으로서의 신은 있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닥치면 초월적인 누군가를 찾게 되며, 그 존재를 사람들은 신이라 부른다. 여기서 신의 존재 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바로, 신은 나약한 인간이 기대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긴 가상의 존재라는 이야기다. 분명 우리는 신을 통해서 마음의 안식을 얻고 자신을 추스를 수 있지만, 그 존재가 실존하는가 와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해석과 더불어 종교라는 것이 그러한 가상의 존재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체화 할 수 있게끔 체계적으로 만든 일종의 도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현대의 방대한 지식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마 신이 실제로 존재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질서 속에서의 불안보다 기댈 존재의 위로와 희망이 더 나은 것이기에 그렇게 여러 규범과 의식으로 포장된 “믿기 위한 미신”을 만들어 스스로를 자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내가 하찮은 인간의 단순하고 짧은 지식으로 감히 신을 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성적으로는 실체로서의 신을 부정하면서도, 내 마음 어느 한쪽 구석에서는 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 할 뿐이다.
참조
아하스 페르츠 :
전설상의 인물<외경(外經)에 등장한다 함>로써 유대에 살던 재봉사였는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하스 페르츠의 집 앞에서 기진하여 쓰러지게 되자 그에게 잠시 쉬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는데 그는 이를 매몰차게 거절하였다 한다. 그런 아하스 페르츠에게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재림할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저주를 내리게 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아하스 페르츠는 아직도 살아서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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