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당신이 받은 축복을 세어보세요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박윤서
댓글 0건 조회 1,474회 작성일 25-05-07 13:19

본문

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에세이-



 나는 원래 한비야라는 이름을 그저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여행 작가라던가, 세계를 돌아다니는 활동가라던가 하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기억은 있지만, 그 사람의 책을 직접 읽어본 적도,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하고도 우연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책을 참 많이 읽는 분이다. 집 안엔 늘 책이 쌓여 있고, 특히 거실 책꽂이는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책들로 가득하다. 긴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본가에 갔던 날, 별생각 없이 그 책장 앞에 섰다. 무심코 책꽂이를 훑다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제목 하나가 있었다. 『그건, 사랑이었네』. 단지 제목에 ‘사랑’이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레 남녀 간의 감정, 연애, 혹은 이별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무거운 책들 사이에서 말랑한 감정을 기대하며 이 책을 꺼냈고, 그렇게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책의 첫 장을 넘기자마자 나는 놀랐다. 이건 연애 소설이 아니었다. 꽃이 피고, 눈이 맞고, 가슴이 뛰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책이 말하는 사랑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지진으로 무너진 마을에서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일, 굶주린 아이에게 죽 한 그릇을 건네는 일, 먼 나라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는 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사랑은 내가 지금까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너무도 크고 조용하며 묵직한 감정이었다.


 한비야 작가는 그 사랑을 몸으로 살아낸 사람이었다. 편안한 삶을 내려놓고, 스스로 험지로 들어가며, 눈앞의 고통에 주저하지 않고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그 사랑은 때때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용기를 가장해야 했고, 때로는 눈앞의 죽음을 마주한 절망 속에서도 계속 걸어 나가야만 하는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잠시 책을 덮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나는 과연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을까? 아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참아본 적이 있었던가? 그냥 누군가를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손을 내밀어본 적이 있었던가?


 솔직히 말하면, 나는 봉사에도, 구호 활동에도, 심지어 종교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 일은 선한 사람들, 특별한 이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저 내 삶을 잘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세상은 너무 크고 나는 너무 작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 하나의 선택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비야 작가는 그런 내 생각을 단번에 뒤엎었다. 그녀가 보여준 사랑은 거창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 그것이 진짜 사랑이었다. 무력한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를 껴안고,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 피난민 아이에게 손수건 하나를 건네며 미소 지어주는 것. 그런 것들이 사랑이었다. 사랑은 거기 있었고, 나는 그제서야 알았다. 사랑은 연애에서만 태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경계에서 피어나는 태도였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많은 것을 바꿔보려 했다. 거창한 일이 아니라, 눈을 마주치는 것부터, 작은 친절 하나를 내어주는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예전에는 무심히 넘겼을 상황에서도 누군가가 힘들어 보이면 한 번쯤 더 생각하게 됐고, 주변 사람들의 말에 조금 더 진지하게 반응하려고 노력했다. 말 한 마디, 표정 하나라도 조금 더 따뜻하게 전하려는 마음가짐 자체가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아주 작고 사소한 변화였지만, 그런 태도 하나하나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서툴고, 때로는 머뭇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그 조그만 용기가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사랑의 씨앗이라는 것을.


 『그건, 사랑이었네』는 내 삶의 방향을 조금 바꾸었다. 단지 더 따뜻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해주었고, 그렇게 사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희망도 안겨주었다. 나는 더 이상 사랑을 남녀 간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제는 그것이 인간을 향한 깊은 공감과 실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걸 아는 삶은 분명히 이전보다 더 깊고 아름답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