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술이 싫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희태
댓글 0건 조회 1,443회 작성일 25-05-19 10:59

본문

 근 여드날,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술을 마실 일이 잦았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궤도에서 잠시 이탈한 위성처럼, 나는 밤마다 알코올의 미약한 인력에 이끌려 이런저런 술자리를 표류했다. 그 와중에도 기억에 남는 풍경들은 있었지만, 오랜만에 대학원 동기들과 함께 지난 주 소주잔을 기울이던 밤의 광경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왁자지껄한 시간이 흐르고 계산이 끝난 테이블 위에는, 마치 전쟁이라도 치른 듯 서른 병 남짓한 초록색 소주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우리의 얼굴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고, 혀는 한껏 꼬여 안부를 묻는 말조차 어눌했다. 그럼에도 별것 아닌 농담에도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소리는 정겨웠다. 그것은 분명, 오랜만에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을 보내다 과거의 기억의 좌표에서 재회한 자들의 해방감과 반가움이 뒤섞인, 조금은 서글프고도 따뜻한 풍경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2020년이니 했으니,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들은 듯한 직장을 구해 사회의 일원이 되었거나, 슬슬 한 가정을 꾸릴 준비를 하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몇몇은 3년 만 야 겨우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 터라, 그간 못다 한 담소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긴, 대학원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각자의 생(生)에 뛰어든 이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추억과 이야기를 잊고 살았던가.

 술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한 매개체다. 평소라면 쉽사리 꺼내지 못했을 속내도, 어색했을 침묵의 순간도 소주 한잔 두잔이 목을 타고 넘어가고, 서서히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면 스르르 녹아 내린다. 마치 녹슨 기계에 기름칠을 하듯, 술은 뻑뻑한 인간관계에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몇 년 만에 만난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나면 어색함은 간데없고,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게 된다. 직장 상사의 험담에서부터 시작해, 예전에 있었던 재미있는 연애 이야기, 그리고 가슴 한구석에 묻어두었던 이루지 못한 꿈 이야기까지. 맨 정신이었다면 결코 입 밖에 내지 못했을 민낯의 이야기들이 술기운을 빌려 허공을 떠다닌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면 우리는 마치 타임머신에 올라탄 듯 과거로 회귀한다. 특히나 학창 시절을 공유한 이들과의 술자리는 더욱 그렇다. 소주병이 비워질수록 나는 스물다섯 살 언저리의 그 시절로, 처음 입학해 철없고 모든 것이 가능할 것만 같았던 그 푸르던 시절로 돌아간다. 그때의 말투와 웃음소리, 심지어는 서로를 부르던 촌스러운 별명까지 소환된다. 현실의 고단함과 책임감은 잠시 잊고, 우리는 깔깔대며 과거의 어느 한 페이지를 다시 펼쳐보는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주름 없는 얼굴의 청춘이다.

 하지만 술이 만들어내는 이 마법 같은 시간여행은 영원하지 않다. 술잔이 비워지고, 대화의 소재가 고갈될수록, 우리는 서서히 현실로 귀환한다. 누구는 대출금 이야기를 하고, 누구는 업무의 고충을 토로하며, 또 누구는 다가올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에 대한 불안감을 내비친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웃고 떠들던 우리였지만, 어느새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짊어진 어른의 얼굴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그때 문득 깨닫는다. 아,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예전에는 밤새 술을 마셔도 다음 날 거뜬했는데, 이제는 숙취가 두렵고, 한두 시간만 떠들어도 쉬이 지친다. 젊음이라는 무한할 것 같던 연료가 생각보다 빠르게 소진되고 있음을, 이런 술자리에서의 미묘한 감정 변화와 체력의 한계를 통해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세월의 흔적, 대화 속에 묻어나는 현실의 무게감은 결국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그들과 함께 과거로 떠났던 짧은 여행에서 돌아와 마주한 현재는, 그래서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술자리가 파하고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길, 택시를 타고 잠시 창문을 내려본다. 새벽 1시의 서울의 밤공기가 제법 차갑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취기는 서서히 가라앉으며 왠지 모를 씁쓸함을 남긴다. 그것은 지나간 청춘에 대한 아쉬움일까, 아니면 변해버린 서로의 모습과 앞으로 더욱 변해갈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일까.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의 찌꺼기일지도 모른다. 즐거웠던 시간 뒤에 밀려오는 공허함. 이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의 또 다른 이면일까.

 돌아오는 길, 휘청이는 걸음으로 밤거리를 홀로 걷는다. 가로등 불빛만이 무심히 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이들은 이제 각자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금 나는 혼자가 되었다. 술이 만들어준 유쾌한 환상에서 깨어나 마주한 현실은, 때로는 이렇게 차갑고 적막하다. 인간이란 결국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며, 술잔을 기울여 과거를 추억하고, 또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내일을 살아가는 존재인가 보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늙어간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이름의, 조금은 서글픈 희극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씁쓸함마저도,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