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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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이 소설은 국민국가로 막 독립한 그리스의 지식인이자 자본가인 주인공이 이념과 책 속에서 삶을 찾으려다 혼란을 피해 크레타 섬으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그곳에서 만난 조르바라는 생동감 넘치는 인물을 고용해 갈탄 광산 사업을 벌이지만, 사업은 연이어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조르바와 깊은 유대를 맺는다. 주인공은 조르바의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삶의 방식에 매료되고, 과부와의 사랑, 죽음, 마을 사람들과의 충돌, 수도사들의 위선, 사업의 몰락 등 연속된 사건 속에서 점차 ‘머리로만 사는 삶’의 한계를 깨닫는다.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진 기공식 이후, 주인공은 이상하게도 해방감을 느끼고, 조르바는 떠나 루마니아와 독일을 떠돌다 동광을 발견하고 생을 마친다. 소설은 조르바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로 끝을 맺는다.
"왜, 왜? 사람들은 도대체 이유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거요? 그냥 기분 따라 하면 안되나요?"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나 사업 실패담이 아니다. 인간이 무엇에 얽매이고, 어떻게 살아야 자유로워지는가를 집요하게 탐색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그 물음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유효한 질문이었다. 주인공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다. 그는 자본주의 속에서 자기 역할을 고민하는 국민국가 시대의 지식인이다. 그는 자국의 독립과 새로운 국민정체성, 이념, 사회적 책임 같은 상위 욕망에 묶인 인물이다. 그 스스로 그러한 이념을 혐오하면서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으론 모든 욕망을 버린 부처를 흠모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런 해탈에도 닿지 못한다. 철저하게 머리로만 사는 사람, 한발짝도 자기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형이다.
반면 조르바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글자를 읽지 못하고 철학을 논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자기 삶’을 살 줄 안다. 배고프면 먹고, 사랑이 있으면 뛰어들고, 고통이 닥치면 춤춘다. 그에게 자유란, 이념이나 해탈 같은 초월적 개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충실한 삶’ 자체다. 그는 사회의 규범, 종교의 죄의식, 미래의 불안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는 본능과 즉흥, 생존의 리듬에 따라 살며, 인간이 가진 동물적 존재로서의 자유를 증명하는 인물이다.
저자는 조르바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만든 문명, 사회, 문화가 또 다른 구속의 사슬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인간은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살아가는 생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능은 그것을 넘어서 사회를 만들고, 그 사회는 새로운 명령 체계를 구축한다. 그 결과 인간은 이중으로 묶인다. 자연적 본능, 그리고 사회적 얽힘. 주인공은 그 두 가지 모두를 버리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둘 다 놓지 못한다. 조르바는 그런 그를 꿰뚫는다. '보스, 당신은 아직도 얽매여 있어. 다만 그 줄이 좀 길어졌을 뿐이지.' 그 말은 냉혹하다. 자유로워졌다고 착각하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나는 과연 무엇에 얽매여 있는가? 그것은 가족일 수도, 명예일 수도, 세상이 말하는 ‘성공’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 스스로 만든 얽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사업이 완전히 무너진 순간, 이상하게도 해방감을 느낀다. 아이러니다. 성취가 아닌 실패를 통해 그는 처음으로 자유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조르바는 그것조차 ‘진짜 자유’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그 경험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살아냈고, 주인공은 여전히 해석하고 있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머리로만 삶을 이해하려 한다. 그는 모든 것을 문장으로, 사상으로 요약하려 한다. 반면 조르바는 '내 안에 수많은 조르바들이 살고 있다'며, 다중적인 자기 자신을 설명한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생각보다는 경험으로 살아간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조르바가 갑작스럽게 광산 개발이 실패한 후에도 흙투성이가 되어 춤을 추는 장면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에도 그는 절망 대신 춤으로 응답한다. 그에게 몸은 슬픔조차 승화시키는 도구다. 이 장면은 나에게 묻는다. '너는 언제 마지막으로 몸으로 인생에 응답했는가?'
솔직히 말해 나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아가지 못한다고 느낀다. 나는 언제나 원칙과 규칙, 도리와 책임 속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왔다. 질서에 반하는 일을 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충동이나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신중하게 계산하고 머릿속으로 삶을 설계해왔다. 그런 나는 조르바처럼 본능에 충실하고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낯설고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내 안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 조르바는 내가 감히 선택하지 못했던 삶을, 망설임 없이 살아낸다. 그의 삶은 자유롭고 단순하지만, 동시에 깊고 단단하다. 나는 그런 조르바를 동경한다. 그리고 그를 보며 나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비록 지금은 여전히 이성과 원칙의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제는 안다. 진정한 자유란, 얽매임을 자각하고 그 너머를 향해 나아가려는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 책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묘비명에 아래와 같은 문장을 새겼다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는 죽음 이후에도 영혼까지 자유롭기를 바랐던, 온몸으로 자유를 갈망한 작가였다. 그는 말년에 남긴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이 자유를 향한 반항과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고백했고, 그러한 여정 끝에 도달한 자유의 실체는 조르바의 삶 안에 있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조르바로 구현된 자유를 엿보았고, 동시에 저자 역시 조르바의 삶을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상태로 여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르바는 단순히 인물이라기보다, 저자 자신이 되고 싶었던 자유의 결정체다. 그래서 이제 나는 안다. 조르바는 나에게 단순한 인물이 아닌 하나의 방향성이다. 언젠가 나도, 얽매임에서 조금 더 벗어나, 그처럼 웃고, 먹고, 일하고, 춤출 수 있을까. 언젠가 나도,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물음이 내 안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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