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鄕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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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鄕愁)
- 백석의 시집, "사슴" 을 읽고 -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아마 누군가는 코웃음 칠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에 낭만이라니!"
허나 나는 여전히 팍팍한 삶 속에서도 낭만을 꿈꾼다.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지배하는 차가운 도시,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발목을 잡아도,
가끔은 세상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무언가를 갈망하며 아직 때 묻지 않은 나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종종 나는 여전히 길을 걷다 문득 시골길을 걷는, 10살이 채 되지 않은 작은 소년을 상상하고는 한다.
구수한 흙내와 귀뚜라미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히고, 반딧불이가 밤하늘을 아스라이 수놓던 그 순간.
그때 만큼은 과거나 현실을 고민하는 대신,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순수한 사색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 상상 속에서 나는 잠시 나마 이 각박한 현실에서 벗어나 숨통을 틔울 수 있게 된다.
퇴근길, 굳이 들르지 않아도 될 서점 앞을 서성이다 홀린 듯 들어섰다.
빽빽한 책장 사이에서 내 시선을 잡아챈 건, 어설프게 꾸며진 표지 대신 그저 하얀 바탕에 옛 서체로 큼지막하게 '사슴'이라 적힌 얇은 시집이었다.
손때 묻지 않은 그 백지가 어쩐지 나를 돌아보게 했다. 결국 계산대로 향하며 내심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연구실에 돌아와 휴게실에서 믹스 커피 한잔을 내리고, 세상의 모든 소음을 차단하려는 듯 헤드폰을 썼다.
여러 시 중에서도 특히 “가즈랑집”을 읽으며, 백석의 언어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나는 아득한 과거로 되돌아가 있었다.
어쩌면 이 순간이 영원할 줄 알았던, 어른이 되는 순간이 결코 오지 않는다고 믿으면서도
누구보다 어른이 되길 빌었던 순수했던 10살 남짓 꼬맹이였던 나로 말이다.
쨍한 웃음소리, 해 질 녘 흙길을 걷던 발자국 소리,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 집 마루에서 어린 나에게 끓여주던 라면의 알싸한 맛.
시를 읽으며 그런 기억을 잠시 나마 눈앞에 선명하게 되살려냈다.
백석의 시는 시대를 초월하는 향토적인 감성으로 가득하다.
그의 시어 하나하나에는 바람 냄새, 흙 냄새, 그리고 사람 냄새가 배어 있었다.
100년 가까이 지난 시대를 살고 있는 내가 그 향토적인 감성에 이끌려 굳이 시집을 집어 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나 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잊고 지냈던 유년의 풍경과 순수한 감정들을 백석의 언어를 통해,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고스란히 펼쳐 보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감성 들은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서 무뎌져 간다.
결혼, 취업, 성공 같은 현실 속의 다양한 어려움 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이제는 미래를 생각할 때 꿈보다는 현실과 돈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내 생각들도 버겁기만 하다.
이제 잠시 시간을 내어, 하루의 마지막에서 나는 그런 것들을 잠시 내려두어 보려 한다.
이 시집을 읽는 순간 만큼은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로운 10살 꼬맹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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