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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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에서 마지막 가을과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의 나는 아직 여물지 않았고 꿈이 많던 신입 대학원생이었다. 그런데 어느 샌가 가정을 이룰 준비를 하는, 제법 농후하게 익은 과일 같은 사람이 되어 있다. 혹은 익은 것을 넘어 조금씩 부패하고 있는 정도 인가.
요즈음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난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나면서 나는 그들과, 그리고 과거의 나와 꽤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결혼을 하고 집을 샀는데 그 집값이 수억 원 올랐다는 친구도 있고, 좋은 직장에 자리를 잡은 친구도 있으며,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 제각기 다른 속도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나는 가끔 묘한 두근거림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을 느낀다.
이 불편한 감각은 어느샌가 내가 연구실의 최연장자가 되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이제 나보다 먼저 이곳에 있었던 선배들은 대부분 떠났다. 처음 연구실에 들어왔을 때 내가 막연히 우러러보았던 형들의 나이와 자리에 이제 내가 와 있다. 그때의 나에게 그들은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연구도, 인생도, 자신의 미래도 어느 정도 정리된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그때의 그들이 되어 있는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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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요즘 밤을 새는 일이 잦다. 이전처럼 일이 많아서도, 실험 장비 앞을 지켜야 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꽤 이성적이고 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기보다는 축복해 줄 수 있고, 사람마다 인생의 속도가 다르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조금씩 자신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마음 한구석에서 자라났다.
그 감정의 색깔은 결코 화사하거나 우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질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사회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삶이 내가 원하는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친구의 직업을 갖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집이나 연봉을 빼앗아 갖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하나씩 확정해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불편했다.
그렇다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이 ‘앞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들이 어느 순간 가슴을 넘어 머리까지 들어왔고, 나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무기력함을 경험했다.
바로 그 즈음,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불안은 단순히 돈이 부족해서 느끼는 불안이나 미래를 알 수 없어서 느끼는 막연한 공포와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불안이다.
우리는 충분한 사랑과 존중을 받고 있는지, 내가 지금 서 있는 위치가 내가 생각했던 나의 가치와 일치하는지 끊임없이 확인한다.
책을 읽으면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내 감정이 어느 정도 설명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나보다 수백 배의 재산을 가진 기업가나 유명 연예인의 성공에는 별로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들이 좋은 집을 몇 채 가지고 있든, 얼마를 벌든 내 삶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비슷한 나이의 친구가 취업을 했다는 소식, 먼저 박사학위를 마쳤다는 선배의 소식, 누군가가 집을 샀다는 이야기에는 마음이 묘하게 흔들린다.
우리는 대체로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한다.
같은 나이에 비슷한 학교를 다녔던 사람, 비슷한 시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 같은 연구실에 있었던 사람. 너무 멀리 있는 사람의 성공은 하나의 뉴스에 가깝지만, 나와 비슷했던 사람이 한 발짝 앞서가는 것은 갑자기 나 자신의 위치를 묻는 질문이 된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디에 있지?’
아마 내가 불편했던 것은 친구들의 성공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 내 삶의 좌표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대학원이라는 공간에서는 이 감각이 유난히 강해진다. 학부생 시절에는 적어도 시간이 모두에게 비슷하게 흘렀다. 1학년이 지나면 2학년이 되고, 정해진 학점을 채우면 졸업을 한다.
그러나 대학원에 들어오는 순간 시간은 이상해진다.
누군가는 빠르게 논문을 쓰고 졸업하고, 누군가는 몇 년 동안 하나의 실험에 묶여 있다.
어떤 사람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 하나로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장비나 공정, 연구 환경의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머무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과정을 모두 알지 못한다. 결국 남는 것은 결과다.
몇 년 차인지, 논문이 몇 편인지, 어디에 취업했는지, 졸업은 언제 하는지.
그러다 보니 박사과정의 시간은 달력보다 사람의 이력으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구는 벌써 졸업했다.’
‘누구는 어디에 취업했다.’
‘누구는 결혼했다.’
하나하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 문장들인데, 그것들이 나란히 놓이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지막에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이 붙는다.
‘그런데 나는?’
알랭 드 보통은 현대 사회의 불안이 오히려 우리가 더 많은 가능성을 믿게 되면서 커졌다고 이야기한다.
신분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던 사회와 달리 현대 사회는 누구나 노력하면 자신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 자유로운 생각이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꽤 잔인한 뒷면이 존재한다.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역설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 ‘그렇다면 그것은 네 책임이 아니냐’고 묻게 만든다.
운이나 환경, 우연과 같은 요소들은 점점 작아지고 모든 결과가 한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성적표처럼 받아들여진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조금 아팠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공부도 연구도 결국 충분히 생각하고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꽤 오만한 믿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연구를 오래 하다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공정이 예상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몇 달 동안 준비한 실험이 한순간에 실패할 수도 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조건이 몇 년 뒤에야 갖추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나는 충분히 잘하고 있는가.
혹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닐까.
이 질문이 반복되면서 연구의 결과와 나 자신의 가치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다.
나는 논문을 쓰는 사람인데, 어느 순간 논문이 곧 내가 된다. 연구가 잘되면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고, 연구가 막히면 내 인생 전체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진다.
참 이상한 일이다.
지적인 사람이 되겠다며 대학원에 들어왔는데, 몇 년이 지나고 보니 숫자 몇 개에 자신의 가치를 맡기고 있었다.
논문의 수, 저널의 이름, 졸업까지 남은 기간, 나이, 연봉, 집값.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는 것을 천박하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삶만큼은 끊임없이 숫자로 확인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오래 남았던 것은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단순한 부나 명예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중요하게 여겨지고 싶어 한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의미 있었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지위의 문제는 어쩌면 사랑의 문제와 닮아 있다. 좋은 직업이나 사회적 성공이 필요한 이유도 그것이 우리에게 돈을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설명해 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명함 하나, 학교 이름 하나, 직장 이름 하나가 대신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잃을 것 같을 때 우리는 단순히 경제적 손실 이상의 공포를 느낀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더 무서운 질문도 있다.
‘그러면 나는 나를 어떻게 보게 될까.’
아마 최근 내가 느꼈던 불안도 여기에 가까웠던 것 같다.
친구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들을 미워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변화가 나에게 나 자신의 시간을 너무 선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불편했던 것이다.
몇 년 전에는 모두가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씩 각자의 이름 앞에 설명이 붙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회사원이 되고, 누군가는 연구원이 되고, 누군가는 부모가 되고, 누군가는 집주인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학생이라는 이름 아래 있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의 일부일 뿐이다. 나는 그동안 많은 것을 했고, 많은 것을 만들었고, 이전의 내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곧 가정을 꾸릴 것이고, 나름의 연구도 쌓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간은 자신이 걸어온 거리보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곳을 훨씬 정확하게 바라본다.
책의 후반부에서 알랭 드 보통은 이러한 불안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가치의 기준을 조금 의심해 보도록 만든다.
사회의 평가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기준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와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사회도 있고, 지식을 쌓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도 있으며, 가족을 잘 돌보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삶의 성취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모든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평가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문장은 생각보다 어렵다. 사람은 사회 밖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남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도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 인정받고 싶고,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다.
나 역시 그렇다. 앞으로도 논문이 잘 나오면 기쁠 것이고, 좋은 평가를 받으면 안도할 것이다. 친구들의 좋은 소식을 들으면 아주 잠깐 나 자신과 비교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제는 그 감정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왜 지금 불안한가.’
‘나는 정말 저 사람의 삶을 원하는가.’
‘아니면 단지 저 사람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멈춰 있다고 느끼는 것인가.’
이 질문들 사이에는 꽤 큰 차이가 있다.
생각해 보면 친구들의 인생 역시 내가 보는 것만큼 완성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집값이 오른 친구에게도 나름의 걱정이 있을 것이고, 좋은 직장을 얻은 사람도 자신의 선택이 맞았는지 고민할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그들의 삶 전체가 아니라 잘 정리되어 밖으로 드러난 몇 개의 장면뿐이다.
그런데 나는 타인의 하이라이트와 나 자신의 비하인드 영상을 비교하고 있었다.
그러니 질 수밖에 없다.
이제 카이스트에서 보낼 계절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가을이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의 차가운 겨울이 올 것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이곳에서 박사가 되면 꽤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확신에 찬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끝에 가까워지고 보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이 보인다.
연구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우러러보던 형들의 모습이 되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도 당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도 자기 앞에 놓인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면서, 태연한 얼굴로 후배들 앞을 걸어갔을 것이다. 내가 멀리서 보았던 단단함은 어쩌면 확신이 아니라 불확실함에 익숙해진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성숙한다는 것은 모든 답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 아니라, 답이 없는 상태에서도 자신의 삶을 계속 끌고 갈 수 있게 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처음의 비유로 돌아가 보면, 나는 과연 잘 익은 과일이 되었을까. 아니면 너무 오래 매달려 있어 조금씩 상하고 있는 과일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익었다는 것은 더 이상 상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이 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질투할 수도 있고, 불안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의 성공을 보며 잠깐 초라해질 수도 있다. 그런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지금까지의 시간이 실패가 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 마음이 흔들릴 것이고, 가끔은 밤늦도록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 그 불안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타인의 성공이 아니라 뒤처지는 것이었고, 뒤처지는 것이 두려웠던 이유는 그것이 곧 나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에는 하나의 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미 멀리 갔다고 생각했던 길에서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한참 뒤처졌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전혀 다른 방향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 역시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번 가을과 겨울에는 조금 덜 자주 옆을 바라보며 걷고 싶다.
몇 년 동안 이곳에서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만들었고 무엇을 견뎠는지를 천천히 돌아보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이곳을 떠나는 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빨리 도착했는지를 확인하기보다는 적어도 내가 선택한 방향으로 계속 걸어왔다는 정도는 스스로 인정해 주고 싶다.
어쩌면 지금의 불안은 내가 아직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이 불안을 완전히 없애려고 애쓰기보다,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묻도록 내버려 두려고 한다.
카이스트에서의 마지막 가을과 겨울은 아마 그런 시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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