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어휘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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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어휘력
- 조아란 저자 -
최근 들어 내가 사용하는 단어가 생각보다 많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글을 쓰다가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적절한 문장으로 옮기지 못해 한참을 고민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도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설명하려고 하면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분명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막상 같은 표현만 반복하거나 주절주절하며 이야기가 길어져버리고 만다. 그러다 결국 '아니 그 있잖아, 뭔 말인지 알지?'라는 말로 얼버무리게 된다. 예전에는 단순히 말을 잘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평소에 사용하는 단어 자체가 너무 적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지식은 늘었을지 몰라도, 정작 일상에서 내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오히려 더 나빠진 것 같다. 가끔은 적절한 단어 하나가 떠오르지 않아 답답해하다 보면 생각하는 능력까지 떨어진 건 아닐까 싶어 무섭기도 하다. 이런 고민을 하던 중 이 책을 접하게 되었고, 마음의 어휘력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와닿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에는 어디선가 스쳐지나가며 들어본 적은 있지만, 정확한 뜻은 잘 모르던 여러 단어들이 소개되어 있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하던 행동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고, 어떤 단어는 그 의미를 읽자마자 주변 사람이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동안 표현이 부족하여 온전히 설명하지 못했던 감정이나 행동들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중 가장 공감했던 단어는 '반추'였다. 반추는 이미 지나간 일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반복해서 곱씹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를 읽으면서 나는 예전에 비해 지나간 대화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는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굉장히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크게 돌려 말하지 않았고, 내가 한 말을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도 지금만큼 신경 쓰지 않았다. 표현이 조금 투박할지라도, 속에 담긴 말에 악의가 없다면 당연히 상대방도 크게 신경쓰고 상처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오히려 불필요하게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은 우유부단하고 답답하니, 뭐든 솔직하게 곧바로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나와는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누군가는 나처럼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편하게 여기지만, 누군가는 같은 내용이라도 말투나 단어같은 사소한 것에 크게 영향을 받고 깊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 상대방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에 따라 말하는 방식을 조금씩 바꾸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바로 했을 말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상대방이 어떤 표현을 더 편하게 받아들일지 고민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대화가 끝난 뒤에도 그런 생각이 계속된다는 점이다. 집에 돌아와서 내가 했던 말이 너무 직설적이지는 않았는지, 혹시 상대방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지 다시 떠올리곤 한다. 당시에는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갔던 대화인데 혼자 곱씹다 보면 괜히 신경이 쓰이고, 차라리 다른 표현을 쓸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상대방은 이미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을 나 혼자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은 이런 내 모습이 조금 낯설기도 하다. 예전에는 별생각 없이 넘겼을 일인데 이제는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험이 쌓이면 사람을 대하는 일이 더 쉬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진 느낌이 든다.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과 지내면서 나도 조금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예전의 내가 더 좋았다고 느끼는 건 아니지만, 타인을 배려하는 것과 지나간 일에 대해 혼자 계속 곱씹는 것은 분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요즘 사람을 대하면서 느끼는 피로감 중 일부는 이런 반복적인 생각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망 효과'라는 단어도 기억에 남았다.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뒤 세상과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현상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생소한 단어였는데, 설명을 읽으면서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스스로 우울하거나 불안한 기분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나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물론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나도 속상하고 걱정하지만, 그런 감정에 빠져 있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지금 고민하는 일이 딱히 큰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 안에서 내가 겪고 있는 일은 수많은 사건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면, 방금 전까지 굉장히 크게 느껴졌던 문제가 갑자기 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과거에 심각하게 고민했던 일들을 지금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때는 정말 중요해서 다른 일은 제쳐 두고 거기에만 몰두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왜 그렇게까지 신경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지금의 고민도 언젠가는 별것 아닌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이 내가 우울하거나 불안한 감정에서 비교적 빨리 회복한다고 믿었던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다만, 내가 감정에서 빨리 벗어났다고 해서 그 문제까지 해결되었던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문제를 크게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것과 실제로 해결한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우울하거나 불안한 감정에서 빨리 벗어나는 데에는 익숙했지만,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고 넘어간 적도 있었을 것 같다. 그렇다고 모든 고민을 끝까지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만, 앞으로는 마음이 편해졌다는 이유만으로 해결해야 할 일까지 지나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결심을 했다.
'선데이 블루스'라는 단어도 재미있었다. 일요일이 끝나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된다는 생각에 느끼는 우울함이나 불안을 의미하는데, 설명을 읽자마자 어떤 기분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일요일에 눈을 뜨면 특별히 밀린 일이 있거나 나쁜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토요일에는 아직 하루가 더 남았다는 생각에 여유롭다가도, 일요일만 되면 다음 날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한다. 해야 할 일이나 다음 날의 일정을 떠올리면서 주말이 벌써 끝났다는 사실에 아쉬워하기도 한다.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으면 시간을 너무 허무하게 보낸 것 같고, 친구를 만나거나 연구실에서 이것저것 하고 돌아오면 정작 제대로 쉬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막상 월요일이 되면 일요일 저녁에 걱정했던 것만큼 힘들지만은 않다. 단순히 다음 날이 싫다기보다는 주말이 끝난다는 사실 자체가 아쉬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선데이 블루스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법한 감정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모든 감정에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때로는 나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있고, 여러 감정이 섞여 있어서 어느 하나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그 감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모든 고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책에 나오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내 경험에 적용하면서 반드시 어떤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막연하게 느끼던 감정이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은 꽤 의미 있게 다가왔다. 사용하는 어휘의 폭이 좁아지면서 생각을 조리 있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고민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내 생각이 정확히 무엇인지 스스로 정리하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았던 것 같다.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뒤엉켜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고 하니 자꾸 같은 표현을 반복하거나 이야기가 길어졌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적절한 단어를 아는 것이 단순히 표현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구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느꼈을 때 습관적으로 '그냥 그렇다'고 넘기기보다는, 그 말 안에 어떤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는지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보고 싶다. 어쩌면 내게 부족했던 것은 단순히 단어의 개수가 아니라, 내 마음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관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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