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으로 스며든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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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으로 스며든 발자국
무정형의 삶, 김민철을 읽고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늘 길 위에 있었으므로."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고향처럼, 언제든 떠나고 싶은 장소가 있다. 그곳은 화려한 장식 대신 지친 영혼에 안식을 건네는 쉼터다. 도피성으로 떠나고 싶은 곳이 아니라 안식을 줄 수 있는 곳. 나에게는 일본이 그런 곳이다. 비행기로 몇 시간 만에 닿지만, 한국과 사뭇 다른 문화가 매번 오묘한 설렘을 선사한다.
매 방학마다 찾았던 일본은 항상 낯설면서도 친숙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도쿄의 구석구석을 누비던 첫 여행이 떠오른다. 미리 찾아 놓은 라멘집에서 저녁을 먹다 나보다 체구가 작은 일본인 아주머니가 세숫대야 크기의 라멘을 국물까지 비우는 모습에 감탄하기도 하고, 이자카야에서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사케 한 잔의 따스함을 즐기기도 하였다. 이튿날에는 옷을 좋아하는 나와 한 친구가 한 조로 옷 구경을 하러 시부야 거리를 돌아다녔고, 다른 친구들은 옷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냥 카페를 갔다가 저녁에 합류했다. 친구들이 나를 배려해 주었음에도, 만나기로 하기까지의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겨우 신발 한 켤레만 사서 친구들과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시부야 스카이에서 빨갛게 물든 노을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었다.
두 번째 일본여행도 도쿄로 갔었다. 첫 번째 여행에서는 일본어를 만화에서 본 정도로만 알아듣을 수 있어서 번역기를 달고 살았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일본어 단어 공부를 몇 개 더해서 이번엔 간단한 회화와 익숙한 한자 정도는 해석할 수 있었다. 이제는 직원에게 음식을 주문할 때 파파고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말이 어느 정도 트여서일까 이번 여행에는 일본인들과 교류가 꽤 있었다.
도쿄역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던 중에 자기도 찍어줄 수 있냐고 다가오신 일본인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쇼핑을 하러 시모키타자와라는 곳에 가던 중 우연히 들렸던 한 대학교의 졸업전시의 학생들도 있었다. 자기 졸업 전시에 온 외국인을 보고 신기해하며 자신의 작품을 열심히 손짓 발짓 해가며 설명해줬다. 물론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오~” 맞장구 치면서 들어주었다.
그리고 저녁에 술집에 갔을 때 옆자리 분들이 일행이 만취해서 우리에게 미안하다며 친구의 형이 보디빌더인데 이 친구는 형과 다르게 술 잘 못 먹는다면서 이야기했고, 그 분들이 가고 바로 같은 자리에 새롭게 온 직장인 아저씨 둘과 한국 드라마, 일본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 요코하마에서 일하는 데 잠깐 도쿄에 출장을 왔다면서, 배용준 이야기도 하고, 자기 딸이랑 아내가 한국드라마에 푹 빠졌다고 우리에게 말하기도 했다.
이번 여행 역시 온갖 관광지와 미리 알아본 식당들을 가느라 스케줄이 빡빡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관광지보다 이런 우연들이 기억에 남는다.
“일상과 꿈의 뒤섞임. 경계의 사라짐. 돌연한 환기… (중략)… 생경한 그 감각이 나는 좋았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현지인들의 삶과 떨어져 관광만 즐기기보다 그 사이에 섞이는 것이 더 의미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일상에 이방인인 내가 들어간 순간, 여행이라는 경계가 허물어져 온 세상이 생동감있게 느껴졌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길 위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침 일찍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 우리에게 인사해주는 버스 기사님, 조깅을 하고 있는 사람들, 따뜻한 햇볕과 그 아래서의 여유. 이 하나 하나가 소중해졌다. 드디어 나는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동안은 여행의 틀을 잡고 떠났지만,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보기에는 너무 바쁘게 다녔다. 한국인은 여행도 일처럼 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말이다. 하지만 무계획의 여행이야말로 비로소 주변의 아름다움과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음을 알았다. 주변을 걷다가 예쁜 카페가 나오면 들리고, 배가 고프면 눈에 보이는 식당을 가거나, 현지인에게 추천을 받고 떠나본다면 나도 그들의 일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계획할 수 있다는 건 예측이 가능하다는 거니까. 나의 좁은 상상 속에 여행을 가둔다는 거니까.”
한편 혼자 떠나는 여행은 무계획의 여유 속에서 숨겨진 일상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동반자와 함께 거리를 누비는 것도 좋지만, 혼자 해외로 떠나보고 싶다. 낯선 골목을 따라 발걸음을 옮길 때, 마음 가는 대로 멈추고 싶은 곳에 오래 머물 수 있다. 그날 기분에 이끌려 공원이나 카페에서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은 혼자라서 누릴 수 있는 사치이다.
또한 혼자라는 상태는 현지인과의 작은 대화를 더욱 부드럽게 이끌어줄 것이다. “어디서 왔어요”라는 한 마디로 물꼬를 트고, 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다. 그렇게 스쳐 간 인연들은 가이드북에 실리지 않은 숨은 명소로 안내해 주기도 한다.
특히 다시금 도쿄로 떠나, 골목길을 자전거로 누비며, 마음 닿는 대로 멈추어 작은 찻집 창가에 앉아 볕에 스며든 커피 향을 음미하고 싶다. 누구의 허락도, 정해진 일정도 없이 길거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순간마다,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 오롯이 나만의 호기심과 감각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은 사소한 기억들이 돌아온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 한 켠에 남아 나를 더 선명하게 만들어 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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