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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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한번 여기에 적은 적이 있듯이,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프로 기사 입단을 목표로 초등학교가 끝나면 어느 기원에 밤 7~9시까지 바둑판에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당시의 한국 바둑, 아니 세계 바둑의 부동의 1위는 이창호 9단이었고, 그 라이벌로는 당시 중국의 강호 마샤오춘 9단과 당시 이창호 9단의 몇 안되는 천적이라 불리던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 9단이 마치 삼국지연의의 천하삼분지계 (天下三分支計) 마냥 우당탕탕하고 있었던 시국이지 않나 싶다. 그 때에는 또한 이창호 9단이 스승인 조훈현 9단의 타이틀을 하나하나 “또 접니다, 스승님” 하면서 야금야금 가져갔던 시점이었고.
그 당시의 바둑을 배우던 사람이라면 예외없이 깊이 공부하던 바둑 기보(한 판의 바둑의 흐름을 정리한 기록) 역시 바로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둘의 기풍(바둑을 두는 스타일)은 정말 이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다르다. 조훈현 9단은 흔히들 ‘속력 행마(行馬, 말의 움직임이라는 뜻으로, 바둑에서는 돌의 움직임을 뜻한다)’의 원조라고 불리는, 신속하게 움직여 초반의 큰 자리를 선점하고 이후 속력을 내면서 생긴 약점을 파고든 상대의 돌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승기를 잡는 스타일이다. 반면 이창호 9단은, 두터움을 바탕으로 자기가 지지는 않을 만큼 상대에게 조금씩 양보하다가, 컴퓨터를 연상하게 하는 계산을 바탕으로 끝내기 (바둑은 보통 초반의 ‘포석’, 중반의 ‘전투’, 종반의 ‘끝내기’로 구분되는데, 중반이 마무리되고 흑백 서로가 최선의 수단을 강구해서 집의 경계를 확정 지어가며 조금이라도 적의 집을 줄이고 내 집을 확장하는 단계를 ‘끝내기’라고 한다) 단계에서 미세하게 차이를 벌려서 이기는 스타일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오늘날 바둑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알파고의 기풍이 이러한 이창호 9단과 너무나도 닮아있다는 것이다. 알파고는 90%의 승률로 5집*을 이길 수 있는 수와 98%의 확률로 1집을 이길 수 있는 수 중에는 무조건 후자를 택하기 때문이다.
* 여기서 ‘집’이라는 것은 단어 그대로 집, 영역을 뜻한다. 바둑은 흑백 서로가 교차하여 한 점씩 돌을 놓아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한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이 때 여기서 0.5집 같은 표현이 나오는 이유는, 바둑에서는 ‘선수(先手)를 다투라’ 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로 먼저 두는 쪽이 유리한 게임이고, 따라서 대국 시작 시 첫 수를 먼저 착점하는 흑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기에 이를 보정하기 위해 백에게 6.5집 (중국식 룰의 경우 7.5집)의 핸디캡을 주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반면으로 흑이 7집을 이겼다면, 한국식 룰로는 흑이 0.5집을 이긴 것이고 중국식 룰로는 백이 0.5집을 이긴 것이다.
“창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재’다. 창호는 자기 바둑 수순도 잊어 먹는다. 세상에 그런 천재가 어디 있나. 게다가 창호는 당연히 치고 나가야 하는 수순인데 갑자기 하수처럼 물러난다. 난 어이가 없어 야단을 친다. 그러면 떠듬떠듬 말한다. ‘그렇게 하면 싸움이 붙고, 그러다가 아차, 하면 역전 당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물러서면 2, 3집밖에 못 이기겠지만, 결코 지는 일은 없다’고. 맞다. 끝내기는 정상급 기사라면 누구나 잘한다. 하지만 창호는 반 집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0.7집을 알고 그 수순을 밟아간다. 그래서 결국 한집을 만들어 낸다. 평범한 바둑 같은데 볼 건 다 본다.” – 동아일보에서 인터뷰한 조훈현 9단의 회고록 中
영화 <승부>는 이러한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 (영화 시점에서는 이창호 4단이니, 이제부턴 이창호 4단이라고 호칭하겠다) 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창호 4단이 제 29기 최고위전에서 스승을 처음 타파하는 순간까지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이다. 영화 내용에 대해서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자세히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조훈현 9단은 영화에서 나온 29기 최고위전을 시작으로 급기야 스승을 무관으로 만들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서도 일화가 있는데, 당시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폭파 전문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조치훈 9단이 조훈현 9단에게 ‘아무리 그래도 제자한테 너무 맥없이 지는 거 아닌가?’라고 한 소리 하자, 조훈현 9단은 ‘그래, 그럼 네가 둬 봐라.’ 라고 했다고. 이후 벌어진 번기에서 조치훈 9단은 이창호와 격돌하여 2국과 3국을 ‘0.5집’ 지고 말았다는 것은 바둑 팬들 사이에선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푸하하, 맞아서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제자한테 빼앗기는 게 낫다. 내 시대가 백년 천년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 것뿐이다. 아내가 가운데서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창호는 원래 말이 없는데다가, 그런 날은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으니…” – 동아일보에서 인터뷰한 조훈현 9단의 회고록 中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라이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서로를 존경하고, 동시에 살아있는 전설로서 경쟁하는 사이이다. 이러한 복잡한 감정이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며,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동료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는 경쟁 속에서도 우정이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실제로도 이 둘은 굉장히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다음의 일화에서도 드러나는데, 이창호 9단의 결혼식 당시 조촐하게, 자신의 가족 및 친지들만 모시고 바둑 관계자들은 일절 초청하지 않았으나, 유일하게 초청한 사람이 조훈현 9단 부부였다고 한다.
오늘날 이 두 전설적인 국수의 행보 이후 중국의 커제 9단을 필두로 중국이 다시 바둑판을 지배하다가, 한국에서 배출한 ‘수읽기의 신’ 박정환 9단을 넘어서 최근에 전성기 이창호 9단의 재림이라고 불리며 그 콧대 높은 중국에서조차 수많은 중국 팬들을 양산한 신진서 9단이 이를 이어가고 있다 (참고로 신진서 9단은 2013 합천 초청 영재 정상 대결에서 이창호 九단을 이미 한 번 꺾었다고 한다). 부디 단순한 승부를 넘어서 조훈현, 이창호 같은 서사시가 이 두 젊은 기사들의 손에 다시 한 번 쓰여서 역사의 한 줄을 장식할 수 있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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