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페이지 정보

본문
걷는 사람
하정우 지음
"그에게 걷기란, 두 발로 하는 간절한 기도. 나만의 호흡과 보폭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 아무리 힘들어도 끝내 나를 일으켜 계속해보는 것."
우리에게 익숙한 ‘천만 배우’ 하정우의 걸음에 관한 에세이다. 그는 무명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거리를 걸으며 출퇴근하고, 기쁠 때든 슬플 때든 한강변을 걸으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 책에는 그런 그의 걷는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매일 하루 3만 보씩 걷고, 심지어는 하루 10만 보까지도 기록한 적이 있다는 그는 스스로 '걷기 마니아' 이자, 주위 사람들에게 걷기의 효용을 전파하는 '걷기 전도사' 이다. 그에게 걷기란 두발로 하는 간절한 기도이자 나만의 호흡과 보폭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나 또한 평소에 걷기를 좋아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하염없이 걷고 싶어졌다. 퇴근 후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갑천변을 따라 한없이 걷고 또 걸었다. 걷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생각은 "걷기는 연구와 닮아 있다." 는 것이다. 겉보기에 큰 변화는 없어도, 그 걸음은 분명히 쌓이고 있고, 결국에는 의미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나는 일정 주기의 일정이 있을 때마다 직전 일정에서의 나와 현재의 나의 모습을 비교하게 된다. 예를 들면 매주의 연구 미팅, 매월의 독후감 작성, 매 분기의 과제 미팅 등이다. 주마다 교수님께 보고드릴 연구 미팅 자료를 준비할 때 일주일간 뭐 했나라는 초라한 생각마저 든다. 지난주의 나에 비해서 현재의 나는 성장하지 못했다고 생각들 때가 많아 울적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주간 미팅을 네 번 치르고 한 달 후의 나를 돌아보면, 한 달 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인과관계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데이터 셋이 형성되는 듯 하다. 매 분기 진행하는 과제 관련 미팅 자료를 준비할 때, 12주간 쌓아온 나의 데이터들은 유의미한 결과를 낳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하나의 연구 흐름이 생기고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의 근거가 생긴다.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한 지 1년이 지난 후, 나는 저명한 학회에서 내 연구를 발표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주 단위로 보면 느껴지지 않던 미세한 변화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의미 있는 성과를 낳았다.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지만, 그 걸음들이 어느새 수 킬로미터를 지나온 것처럼, 걷기와 연구는 본질적으로 닮아 있다. 걷기처럼, 연구도 결국 ‘계속하는 것’에서 의미를 갖는다.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그러나 길 위에서 만나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걷기가 주는 선물은 길 끝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내 몸과 마음에 문신처럼 새겨진 것들은 결국 서울에서 해남까지 걸어가는 길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길 위의 매 순간이 좋았고, 그 길 위에서 자주 웃었다."
가장 혁신적인 기술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고, 가장 깊은 발견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연구의 끝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이다. 그 끝이 창대할지 마지막이 미약할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걸어간다. 연구를 한다는 것, 아무도 간적 없는 낯선 길을 걷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내가 이 책 속 위의 문장들이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다. 연구도 걷기도,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을 수 있지만 그 길 위에서 마주한 순간들이 모여 결국 '나'를 만든다. 작은 실험 하나, 실패한 결과 하나, 기록해둔 데이터 하나가 모여 오늘의 나를 만들었듯, 그 모든 순간은 의미가 있다. 결말의 허무함에 상심하지 말자. 낯선 길을 걷는다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의미 있고 신성한 일이다. 오늘도 나는 가보지 않은 길 앞에 서 있다. 두려움도 있지만, 그보다 큰 설렘이 내 발걸음을 재촉한다. 걸음이 멈추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은 가고자 했던 길에 어디쯤일까.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인긴이기에 나는 오늘도 걷는다. 비록 속도는 느릴지라도,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때로는 멈추고, 흔들리고, 돌아가더라도 결국 다시 걷기 위해. 연구실의 책상 앞에서, 혼자 걷는 저녁 길 위에서, 나는 나만의 보폭으로 걸음을 이어간다. 언젠가 마주할 길 끝보다도 지금 이 순간의 걸음 하나하나가 나를 만든다는 믿음으로 나는 계속 걸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이 모든 걸음이 모여 하나의 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 이전글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25.04.14
- 다음글1984, 그리고 2025 25.04.1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