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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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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희태
댓글 0건 조회 1,521회 작성일 25-01-15 09:32

본문

1.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의 브라우나우암인(Braunau am In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공 출신으로, 국민학교 교육만 받았지만 세관 공무원으로 입신양명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아버지를 애증의 대상으로 묘사한다. 아버지는 히틀러에게 항상 존경해야 할 대상이면서도 그의 꿈을 매몰차게 방해하는 존재였다. 아버지는 히틀러가 세관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며 김나지움(Gymnasium)에 입학시켰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을 따랐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업에 흥미를 잃게 된 히틀러는 아버지와 갈등을 겪었다. 히틀러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며 아버지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러한 생각에는 그 자신이 곤란한 생활이 주는 고통을 맛보며 살아왔기 때문에, 인문학 공부는 비실용적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점이 더해졌으리라. 생존투쟁으로 교만해져 버린 그의 성질에는 경험도 부족하고, 아직 어린 소년에게 이런 결정을 맡긴다는 것이 정말 참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으리라.”

 

이러한 갈등은 히틀러가 미술에 재능이 있음을 아버지가 알면서도 더욱 심화되었다. 1903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1907년에는 어머니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된 히틀러는 더 이상 방해물이 없다고 느꼈다. 이후 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했다.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던 히틀러에게 빈은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그는 화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미술대학에 지원했으나 두 번 낙방했다. 점차 고아연금과 부모의 유산이 바닥나면서 그는 궁핍한 삶을 살았다. 처음에는 사치와 문화생활에 돈을 썼지만, 이후에는 기숙사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엽서나 작은 그림을 팔았다.

 

다양한 민족과 계층이 뒤섞인 빈의 환경에서,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부의 불평등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대중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운동을 통해 자긍심을 고취하려 했으며, 히틀러 역시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그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극우단체를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재산을 헌금으로 내놓는 사람들을 보며, 비참한 현실 속에서 자신을 우수한 민족과 강대한 국가의 일원으로 투영하며 위로 받으려 했음을 추측했다.


 

2.
책에서는 도시로의 이촌향도 현상에서 생겨난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해 기술한다. 당시 노동집약적 산업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젊은 농민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도시로 이주했지만, 산업이 성숙해지며 일부 일자리가 기계로 대체되면서 잉여 노동력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실업’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히틀러는 이를 “노동자의 운명”이라 표현하며, 빈이라는 도시는 그의 경험 속에서 생존투쟁의 현현이었다고 서술한다. 그는 불행한 노동자들에게 “국민적 자긍심”을 일깨우라고 주장하며, 생존투쟁 속에서 독일인의 본질적 자긍심을 잃어버린 이들을 “경제적 비참”, “도덕적 천박”, “정신적 문화의 저열함”이라 비난했다.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정신’, ‘문화’, ‘예술’이라는 키워드는 히틀러의 예술에 대한 애정과 사상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는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고, 민족주의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3.
히틀러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했으나, 곧 환멸을 느꼈다. 그는 사회민주당원들이 자신의 생각을 조종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노동자의 투쟁과 평등을 가치로 삼는 사상에 반감을 가졌다. 그는 이를 “정신적 테러”라 표현하며, 배급 받은 빵과 우유로 빈약한 점심을 먹으며 자본가의 착취를 논하는 그들을 보며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히틀러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기보다 노동자들을 지배해야 할 존재로 여겼다.

 

히틀러는 저서에서 대중의 심리를 “여성의 감수성”에 비유하며, 대중은 이성보다는 감정적 동경에 의해 행동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대중이 정치를 주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민주주의와 노동조합의 폐해를 강조했다. 오히려 민중은 민족 공동체를 기반으로, 아리아 민족의 성실성과 신성을 유지하는 것이 국민의 이익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히틀러는 자신의 세계관을 설명하며,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입각한 독일의 부흥을 주장했다. 그는 아리아 인종을 우월한 민족으로 규정하며, 독일 민족의 생존을 위해 순수성을 보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독일 사회의 부를 착취하는 기생충으로 묘사하며, 이들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나의 투쟁”은 당시 독일에서 베스트셀러로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독일 사회에 파시즘 광풍을 일으켰다. 히틀러는 이후 독일 제3제국의 총통으로 취임하여 수많은 학살과 비극을 초래했다.

 

책을 읽으며, 히틀러의 사상이 오늘날 한국의 특정 현상과 유사하다고 느껴진다. 태극기와 미국 국기를 흔들며 한국인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가는 모습에서 빈 시절 극우단체의 행동과 닮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제2의 “나의 투쟁”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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