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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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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찬미
댓글 0건 조회 1,430회 작성일 25-01-05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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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한강 -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언어의 장벽은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수학과 희랍어에서만큼은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동양인이 희랍어에 능숙하다는 점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고, 그 관심은 그를 희랍어에 더욱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시력이 좋지 않으셨기에, 유전적으로 언젠가는 시력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였지만, 그의 내면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결국, 그는 가족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와 희랍어 강사가 되었다. 그에게 희랍어는 어두워질 자신의 세상과 닮은, 잊혀지고, 닫힌 어둠을 느끼게 하는 언어였다.


그에게는 독일에서 만난 청력을 잃은 애인이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곤 했고, 그 모습은 그에게 사랑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시력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곁을 떠났다. 그녀와의 이별은 남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편,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어릴 적 영리하고 언어에 재능이 있었지만, 17살이 되던 해 갑작스럽게 단어를 떠올리고, 입 밖으로 내뱉는 과정 자체가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했던 것들이 갑작스레 부자연스러워지며 그녀는 수치심과 패배감을 느꼈고, 결국 말을 점점 잃어갔다. 그런 그녀에게 희랍어는 억눌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탈출구였다. 낯설고 오래된 고대 언어는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담아냈고, 그녀는 희랍어를 통해 자신의 마음속 깊은 소리를 표현할 수 있었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가는 여자는 희랍어를 매개로 서로를 만난다.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 속에서, 그들은 각자의 결핍을 보듬으며 서로를 이해하고 서서히 물들어 간다. 시각과 청각이라는 감각을 잃어가는 두 사람의 교감은 시적이면서도 애틋하게 그려진다. 그들의 사랑은 복잡한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대신, 응축된 장면과 영상처럼 감각적으로 전달되어 독자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언어는 외부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결핍을 통해 언어를 초월한 교감을 이루었다. 그 투명한 소통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었다.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말을 주고받지만, 과연 얼마나 온전한 소통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종종 날카로워 타인을 상처내기 쉽지만, 반대로 치유와 공감의 도구로 사용하기는 어렵다. 언어는 배울 때는 쉬울 수 있지만, 이를 감정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 책은 사람과 사람 간의 진정한 소통은 언어가 아닌 감정의 교류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일깨운다. 그것이 작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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